영화 ‘퍼펙트 게임’은 박희곤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조승우와 양동근이 주연한 작품으로 한국프로야구 사상 가장 처절한 투수전이었던 1987년 5월 16일, 사직구장에서의 최동원과 선동열의 3번째 선발맞대결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영화제작 발표시점과 프로야구의 흥행이 절묘하게 맞물려 크랭크 인 전부터 큰 관심을 끌었으며, 당시의 현역선수들이 대다수 생존해 있어 화제의 대결을 재연할 영화의 퀄리티도 기대된다는 평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마케팅의 실패로 흥행은 전국 150만 3,553명이라는 기대 이하 성적을 기록해 역시 ‘야구영화는 안된다’라는 한국영화계의 속설을 또다시 입증하고만 영화이기도 합니다.
일단 두 주연 배우들의 캐스팅은 완벽하다 할 수 있을 정도라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성실함으로 대표 되는 최동원의 이미지를 조승우가 잘 살렸으며, 선동열역은 정말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양동근이 완벽하게 소화해 냈습니다. 영화 제작 중, 실제 주인공인 최동원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영화의 재연도에 대해 많은 팬들이 기대하고 걱정하였다고 합니다. 실제 최동원으로 분한 조승우는 고인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장례식장에서 의지를 다지는 인터뷰를 남겼다는 후문입니다.
특히 조승우는 고 최동원을 많이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인의 와인드업(windup, 투구자세 중 하나) 시 보여 주었던 다이나믹한 키킹(kicking, 한창 때는 발이 거의 이마까지 올라갔다)을 거의 근사치까지 흉내 냈고, 부산 사투리도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최동원을 그린 듯이 닮은 미소였습니다. 때로 활짝 웃기도 하지만, 대개는 입이 우선 오무려진 뒤 조금씩 이를 보이며 그려 가던 최동원 특유의 수줍은 미소. 그걸 조승우가 스크린상에서 선보일 때는 아까운 나이에 하늘로 간 최동원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는 세간의 평이 많습니다.
서두에서도 서술했듯이 영화 ‘퍼펙트 게임’은 1987년 5월 16일 최동원과 선동렬 두 불세출의 두 투수가 벌인 그야말로 '영웅적인' 투수전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1승씩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은 나란히 선발투수로 롯데의 홈구장인 사직운동장 마운드를 밟았고, 그때부터 징(?)하도록 긴 명승부를 조율해 나갑니다. 2대 2의 스코어. 그러나 롯데와 해태 양팀 타선 모두에게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용의 배 속에서 뿜어 나오는 불같은 강속구로 거의 혼자 힘으로 롯데를 우승시켰던 중천의 해 최동원과, 고려대 시절부터 그때까지 부동의 에이스로 상대 팀의 공포의 대상이던 떠오르는 해 선동렬은 그야말로 공 하나 하나에 자신들의 명예를 실어 던지는 듯했고, 투수전은 재미없다는 말은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몰매도 모자랄 망언으로 화하고 맙니다.
가끔 선수단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배트로 의자를 부숴 버리던 카리스마 짱 김응룡 감독도, 롯데의 성기영 감독도 감히 마운드에 올라가 공을 달라고 요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타자들은 본의 아니게 조역이 되어 갔습니다. 9회를 넘어서도 더욱 쌩쌩해지는 둘의 공은 관중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나이 서른의 최동원은 던질수록 젊어지는 듯했고, 대주자 작전을 쓰느라 포수 자원을 다 써 버려서 직구만 겨우 포구 가능한 내야수 백인호에게 마스크를 맡긴 선동열은 직구로 롯데 타선을 농락했습니다.(이 대목은 영화에서 만년 후보 포수 박만수의 인생역전 스토리로 각색됩니다.)
경남고와 연세대를 나와 부산에 연고지를 둔 제과회사 '롯데의 수호신'이었던 최동원과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나와 광주에 둥지를 튼 제과회사 '해태의 간판'이었던 선동렬은 각각 200개가 넘는 공을 던지며 격렬하게 맞섰습니다. 장엄하기까지 한 승부였습니다. 또 그때 그 시절이니만큼 가능한 승부였습니다. 요즘이라면 200개 이상의 공을 뿌려(던져) 대는 1대 1 승부란 상상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경기는 승부를 가르지 못하고 무승부로 끝을 맺습니다.
1승 1무 1패를 마지막으로 최동원과 선동렬 둘의 맞대결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자면 선동렬은 당시 떠오르는 태양이었고, 최동원은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이긴 했지만 지는 해였습니다. 선동렬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일본에서도 '쥬니치의 태양'으로 군림했고, 선수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행운을 누렸지만, 최동원은 그 뒤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은퇴한 뒤 야구계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하는 '야구계의 야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정적 계기는 1988년 "선수 상호 간의 친목과 복지"를 내세운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였고 최동원은 그 선봉장이었습니다. 당시 최동원의 코멘트는 영화에서 조승우가 멋지게 내뱉던 대사, "게임은 최동원이 끝냅니다. 이겨도 내가 끝내고 져도 내가 끝냅니다!"만큼이나 사람을 울컥하게 만듭니다. "누군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 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 고 최동원의 말입니다.
1988년 9월 30일 마침내 계룡산에서 선수협 대의원 총회가 개최되던 날. 물론 각 구단들의 방해 공작은 가히 간악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지경이었습니다. '노조 없는 기업'의 대명사 삼성은 담당 이사가 직접 설득에 나서는 한편, 박승호, 장효조, 김시진 등 해당 선수의 부인을 협박해서 남편의 행동을 저지하도록 했습니다. 해태는 새벽부터 구단 직원들을 선수들의 집 앞에 대기시켜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졌고, 태평양은 선수 전원을 구단 사무실에 집결시켜 일일이 포기 각서를 받아 냈습니다. 롯데의 경우도 선수들을 소집하여 오후 6시까지 잡아놓은 뒤 '이제는 못 가겠지' 하고 풀어 줬는데 롯데 소속 대의원들 김용철, 유두열, 김민호, 한영준, 김용운, 윤학길 등은 나는 듯이 계룡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모였지만 정족수는 미달됐고, 구단들의 압박은 더욱 강화되면서 끝내 선수협은 와해되고 맙니다. 그리고 선수협의 주동 최동원은 롯데 유니폼을 벗게 됩니다.
선수들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졌던 롯데의 경우 선수들에게 '선수협 포기 각서'를 요구합니다. 이 치졸한 요구에 결연히 불응했던 이가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최동원의 앙숙으로 등장하는 김용철이었습니다. "안 한다 캤으면 됐지 각서까지 낼 이유가 뭐꼬?" 예나 지금이나 속 좁기로는 롯데 껌 종이만도 못한 롯데 구단은 김용철의 훈련 참가를 불허합니다. 선수단은 이 구단의 조처를 두고 단체 행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투표에 부치지만, '롯데의 최동원'이 한칼에 날아가는 것을 지켜봤던 선수들은 단체 행동에 반대하고 김용철은 여기에 분통을 터뜨립니다. "우째 자~들이 내 동료란 말이고. 자들 믿고 무슨 야구하겠노." 롯데에 정나미가 떨어진 김용철은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롯데 구단은 얼씨구나 그마저 롯데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최동원에 포커스가 맞춰지다 보니 본의(?)아니게 김용철의 캐릭터가 과하게 꼬여버린 감이 큰데, 실제 최동원과 김용철 두 사람의 사이는 절대 영화에서처럼 앙숙지간이 아닙니다. 김용철은 친구이자 동료였던 최동원의 투수로서의 능력과 스타로서의 입지를 누구보다도 인정하던 이들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아무튼 영화 ‘퍼펙트 게임’의 주연과 감칠맛 나는 조연은 그렇게 '롯데 자이언츠'에서의 야구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뒷이야기를 하다 보니, 새삼 영화의 장면들과 1987년 5월 16일 실제로 벌어졌던 야구 영웅들의 혈투가 머릿속을 감아 듭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던 장엄한 승부. 그러나 그 주인공들 중 한쪽은 치졸하고 추악한 구단들의 횡포 속에 쓸쓸하고 씁쓸한 뒤안길로 퇴장해야 했습니다.
현재 부산 사직구장에는 부산의 스타였던 고 최동원 선수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무쇠팔'이라고 불린 고 최동원 선수는 경남중-경남고-연세대-아마추어 롯데를 거쳐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습니다. 롯데에서 그는 8시즌 동안 통산 248경기 1414⅔ 이닝을 소화하며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를 기록했습니다. 데뷔 첫해인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매년 200이닝 이상 소화해 '무쇠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물론 이 ‘무쇠팔’ 타이틀은 이미 고교와 대학시절 엄청난 투구 수를 자랑(?)하던 때에 얻은 것이긴 합니다만... 특히 1984년에는 무려 51경기에 등판해 284⅔이닝 동안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 같은 해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한국시리즈 4승 기록은 당시도 화제였는데 아마도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대 기록이라 생각됩니다. 현재 프로야구 각 구단의 투수 로테이션 시스템상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투수 한사람이 4경기는 고사하고 3경기(그것도 무리해서)이상 등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최동원 선수. 84년 삼성과의 코리안 시리즈 당시 "코리안 시리즈 네 번을 다 나갈 수 있겠나?"라는 감독의 어이없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질문에 "해 보입시다, 마"를 부르짖었던 불굴의 투수, "내가 안 하모 누가 하겠능교?"라고 금테 안경을 쓸어올리며 선수협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용감했던 사람, 고 최동원 선수! 한국에 야구라는 스포츠가 들어온지 112년(1905년을 시초로 한다면...), 그리고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지 35년, 그동안 한국 야구와 프로야구를 빛낸 수많은 선수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쇠팔’ 최동원이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 작지 않습니다. 가히 불세출 혹은 불멸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 최동원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세상속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빈 후드’의 무지왕 존, 영국 왕조 최악의 군주 1 (0) | 2017.10.13 |
---|---|
‘초한전기’ 2012년 작 역사드라마 초한지, 항우와 유방의 대결 (0) | 2017.10.12 |
박보검 종교와 ‘예수중심교회’ 이단 논란 (0) | 2017.09.28 |
J-POP의 여왕 아무로 나미에 은퇴 선언, 25년 활동 접는 이유는? (0) | 2017.09.23 |
주말극 ‘황금빛 내 인생’ 식상한 소재와 박시후 캐스팅 논란 (0) | 2017.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