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아래 글에서 서술하는 영국왕조는 ‘정복자 윌리엄’으로 불리 우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1066년 잉글랜드 지역을 점령하고 노르만 왕조를 성립한 이후부터를 말하며 최악의 군주들로 선정(?)한 존 왕과 에드워드 2세의 경우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주관적 판단기준에 근거했음을 명시합니다. 물론 중세 영국 역사를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암군(暗君)인지 알고 계실 것이며 순위(?)의 차이는 있더라도 존 왕과 에드워드 2세 두 사람이 영국 왕조 최악의 군주 리스트 최 상위권에 자리하는 것에 크게 반론은 없으시리라 생각됩니다.
먼저 시대 순으로 무지왕(혹은 실지왕)이라 후대에 불리우는 존 왕부터 살펴보자면, 그는 1167년 노르만 왕조의 뒤를 이은 영국 플랜태저넷 왕조의 초대 군주인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아들 4형제(3살에 사망한 기욤9세를 포함하면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 유명한 사자심왕(Lion Hearted) 리처드 1세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사실 존 왕은 영화나 드라마 등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유명인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전설적인 영웅인 로빈 후드가 존 왕과 그의 형인 리처드 1세의 치세기간 인물이기 때문입니다(로빈 후드의 실체는 있는데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음). 따라서 로빈 후드와 항상 함께 미디어물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암군의 상징적 존재라는 것인데, 그의 별칭인 무지왕(실지왕)이 많은 것을 설명한다 하겠습니다. 사실 이 무지왕이란 별칭은 무지몽매하다의 그 무지가 아니라 정복한 땅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땅을 많이 잃었다는 뜻의 실지왕과 일맥상통해서도 그렇습니다.
존 왕이 영화나 드라마 등에 많이 등장한다고 했는데, 가장 최근으로는 러실 크로우 주연의 2010년 작 ‘로빈 후드’가 있고 그전엔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1991년 작 ‘로빈 훗’이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선 ‘흑기사’로 알려져 있는 1952년 작 ‘아이반호’도 유명합니다. 수차례 영화화되며 수작으로 평가받는 ‘겨울의 라이온’에도 등장합니다. 그 외 영·미 지역의 여러 드라마나 미니시리즈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미디어물에서의 그의 이미지는 한 결 같이 부정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항상 악독한 지역 영주들과 결탁해 국민들을 억압하다 마지막에 짠~하고 등장하는 그의 형 리처드 1세에 의해 꼬랑지를 내린다는... 뭐 그런 스토리가 주를 이룹니다. 하지만 실제 존 왕의 치세는 미디어물에서 다뤄지는 리처드 1세 때의 일들 이후에 실제 그가 정식으로 국왕자리에 오르며 본격화 됩니다.
우선 존 왕의 치세 이전 잉글랜드 상황을 살펴보자면, 원래 존의 부왕 헨리 2세가 자신의 4형제 중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 막내였던 그였다고 하는데. 헨리2세는 당시 존에게 왕국내 알짜 영지인 아키텐 지방을 물려주려고 무지 애를 썼습니다. 심지어 3남 제프리의 상속분을 없애서라도 아키텐을 물려주려 하자 세 아들 헨리, 리처드, 제프리와 아내 엘레오노르 왕비가 결사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반란은 결국 헨리 2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결국 아키텐의 상속은 포기해야 했으며 글로스터 백작의 상속녀와 존을 결혼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가 총애한 존은 정작 형 리처드 1세가 다시 헨리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완전 막장 패밀리!) 처음엔 아버지 헨리 2세에 붙었지만 전황이 형 리처드 쪽으로 기울자 아버지를 배신하고 형에게 붙고 맙니다. 참고로 이 일로 헨리2세가 엄청나게 실망해 사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떡잎부터 뭔가 암울한 느낌을 풍기기 시작한 존은 1190년 형 리처드 1세가 왕위에 오른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해 십자군 원정을 떠나면서 셋째형이었던 제프리의 외아들인 브르타뉴 공작 아서(아르튀르)를 후계자로 발표하자 당시 프랑스 군주였던 필리페 2세와 작당해 영국 왕위를 노리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리처드 1세가 2차 십자군 원정에서 그 유명한 살라하딘과의 ‘건곤일척’의 대결을 무승부로 끝내고 돌아오던 중 독일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포로로 잡힌 뒤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자 형에 의해 모든 영지와 작위를 몰수당하고 추방되지만 곧 자비로운 형의 용서를 받아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1196년 조카 아서가 브르타뉴의 반란자들에 의해 프랑스의 필리페 2세에게 인질로 넘겨지자 리처드 1세는 어쩔 수 없이 동생 존을 자신의 후계자로 공식 인정합니다.
1199년 리처드 1세의 사후에 존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지만 1200년 첫 번째 부인인 글로스터의 이사벨과 이혼하고 이미 루지냥의 위그 9세와 약혼한 상태였던 앙굴렘의 이사벨과 재혼하며 큰 문제가 발생하고 맙니다. 파혼의 대가로 루지냥가에 배상을 제대로 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존 왕은 그러질 않았고 이에 격분한 루지냥가가 주군인 필리페 2세에게 존 왕을 제소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후 필리페 2세는 존 왕을 프랑스 법정에 소환했고 이에 대해 존 왕은 당연히 거부를 합니다. 이에 필리페 2세는 다시 프랑스내 영국령(대륙령)을 존 왕의 조카 아서에게 하사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 뒤 존 왕은 아키텐 지역을 공격한 아서를 재공격해 포로로 잡게 되는데 포로가 된 아서가 행방불명이 되고 맙니다. 이때부터 공식기록에 아서의 흔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당시부터 세간에선 조카 아서를 존 왕이 살해했거나 살해를 사주했을 것이란 흉흉한 소문들이 돌게 됩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프랑스내 영국령 영주들이 대거 필리페 2세쪽으로 등을 돌리자 필리페 2세는 기세등등하게 노르망디 지역을 유린하게 되고 결국 존 왕은 아키텐을 제외한 나머지 영국의 대륙령 전체를 프랑스에 빼앗기고 맙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05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대립해 1207년에는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 1209년에는 존 왕에 대해 파문 선언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에 분노한 존 왕이 1209년부터 1211년까지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소득을 국가에 귀속하기도 했는데, 1213년에는 교황이 아예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 침공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잉글랜드 전체를 교황에게 봉헌하는 형태로 간신히 용서를 받았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왕국의 대륙령 상실과 파문 소동 등으로 잉글랜드의 귀족과 평민 모두는 존 왕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고 맙니다.
한편 존 왕은 노르만 왕조의 근거지였던 프랑스내 대륙령을 되찾기 위해 1214년 대대적으로 세금을 거두고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4세와 플랑드르 영주 등을 끌어들여 대륙령을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고 결국 존 왕은 아무 소득도 없이 전비(+동맹으로 끌어들이는데 지불한 막대한 금액)만 왕창 쓰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자국내에서 가뜩이나 인기가 없었는데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고도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존 왕에게 ‘1214년 전쟁’의 패배는 결정타였습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존 왕에게 귀족들은 더 이상 세금을 못 내겠다고 반기를 들었고 그 결과가 바로 1215년에 맺은 역사적인 ‘마그나카르타’입니다.
일명 ‘대헌장’으로도 불리는 ‘마그나카르타’는 존 왕의 실정에 지친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성난 국민을 등에 업고 국왕을 협박해 얻어낸 일종의 계약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계약서라고 치부 할 수만 없는 것이, 효력이 한동안 제대로 없어서 사문화 된 것 같아 보였지만 그 상징성은 향후 잉글랜드 권력의 분배와 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왕이라는 일인이 가지고 있던 절대적 권력을 일부이기는 해도 귀족들과 나누는 행위를 가능케 한 첫 역사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후 명예혁명과 산업혁명 등을 겪으며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현대까지 권력의 이동의 향배를 정한 일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권신수설’이 남아있던 그 시대에 귀족들이 국왕에 대항해 일으킨 사건이라는데 초점을 맞춰봐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데엔 시대적으로 십자군 원정 등의 실패로 인한 신-교황/(-)왕-신민(귀족)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무너지게 되는 큰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존 왕이 귀족들과 모의를 해서 왕좌에 올랐기 때문에 권력구도 자체가 절대적인 제왕과 충성스런 신료들의 관계가 아니었고 형인 리처드 1세부터 발생한 막대한 부채 탕감을 위한 경제정책 등 국정을 잘 추진하기보다는 실정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발생한 측면도 큽니다.
아무튼 존 왕은 억지로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후 재위 마지막 해에는 교황에게 호소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파문하는 등 반격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귀족들은 당시 프랑스 왕세자(도팽)였던 루이 8세를 초빙해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려 하였으나 1216년 존 왕이 급서하고 그의 어린 아들 헨리 3세가 즉위하며 반란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존 왕의 마지막 죽음과정도 암군답게 막장스러운데 일설에 따르면 사인은 다름 아닌 과식이었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질이었습니다. 이질로 인해 속이 좋지 않았던 존 왕은 그걸 치료한답시고 익힌 고기와 과실주를 많이 먹는 돌팔이 처방을 자신에게 내렸다가 급체로 사망했던 것입니다.
존 왕에 대한 후세의 평은 의심이 많고 복수심이 강하며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대세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비해 교양과 학식을 갖춘 인물이라는 평도 공존합니다. 대단히 활동적인 성격으로 여행과 사냥을 즐겼는데 이로 인해 이전의 그 어떤 노르만 및 플랜태저넷 왕조의 군주들 보다 자국 영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특히 사법과 재무 행정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소유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은 천성 탓에 충성스런 신하가 적었고 지방 영주들(특히 프랑스내 대륙령 지역)은 물론 라이벌 프랑스의 군주 필리페 2세와의 관계도 극도로 나빠져 결국 그가 최고의 암군 타이틀을 달게 된 결정적 요인이 대규모 영토 상실까지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한국역사에서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영웅으로 칭송받는 중요한 이유가 광개토태왕이 엄청난 ‘정복왕’이었다는 점에서 대척점에 서있는 존 왕이 후세에, 특히 영국인들에게 얼마나 한심한 군주로 비춰질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존 왕 입장에선 다소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행정 분야에 일가견이 있었고 거대 영토를 상실하긴 했으나 전투 지휘관으로서 영 무능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형인 사자심왕(라이온하트) 리처드 1세 만큼은 아니라도 꽤 유능한 전략가였으나 문제는 그가 수립한 전력이 실제 전투에서 성공하기엔 매번 너무 복잡·난해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결과로서 평가되기에 그가 영국 노르만 왕조의 시발점이었던 영국의 프랑스내 대륙령을 대부분 상실했다는 점에서 최고의 암군 타이틀을 벗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가 역사에서, 특히 잉글랜드 역사에서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인물인가하면 그의 뒤를 이은 수많은 잉글랜드 군주들 중 존이란 이름을 쓴 이가 두 번 다시없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암군 타이틀은 두 대를 건너 자신의 증손자인 에드워드 2세로 이어집니다. 그럼 다음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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