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무지왕 존, 영국 왕조 최악의 군주 1’에 이어 이번 글에선 그 두 번째 주인공인 에드워드 2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존 왕이 여러 미디어 물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물인 것과는 달리 에드워드 2세는 이번에 언급하는 영화 ‘브레이브 하트’외에는 그 존재를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찾아보기 힘든 군주입니다. 이점은 그가 그만큼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라는 방증도 되겠습니다(물론 미·영 지역에서 연극이나 드라마 등에 주·조연으로 두어 번 등장하긴 했으나 영어권 외에서 그리 알려지지 않은건 마찬가지입니다). 에드워드 2세의 증조부이기도 한 존 왕의 경우 대표적 암군인 점도 중요하지만 그가 근대 영국 의회 민주주의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마그나카르타’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상징성(왕조 입장에선 부정적)이 있습니다. 반면 에드워드 2세가 존 왕과 더불어 영국내에서 인정받는 대표적 암군임에도 존재감이 약한 점은 두 배 안습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군주의 실정이라는 측면에서 에드워드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끊임없이 패하며 영국의 대륙령 대부분을 상실하고 뒤이어 귀족들의 협박에 가까운 압력에 밀려 군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상당부분 포기해야만 하는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증조부 존 왕 만큼 왕조에 치명적인 누를 끼치진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 때리며 치세를 보낸 군주라면 존 왕에 이어 최악의 군주 두 번째 인물에 선정(?)되는 치욕만은 면했을 텐데 결정적으로 그를 암군의 이미지로 만든건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력 상실과 더불어 바람난 마누라와 그녀의 정부(情夫)손에 왕좌에서 쫓겨난 한심한 왕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주관적 시각입니다만...
에드워드 2세는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도 등장하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넷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의 형들이 어린나이에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후계자가 된 케이스입니다. 에드워드 1세의 경우 영화에선 잔인하고 때로는 비열하기까지 한 폭군의 모습으로 비춰지나 이건 어디까지나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고 실제 잉글랜드 입장에선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명군으로 평가 받습니다. 그런 뛰어난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1307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중 진중에서 병사한 에드워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2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귀족들과 마찰을 빚게 되는데 바로 그의 어릴 때부터의 절친(애인?)인 프랑스 출신의 피에르 가베스턴이란 인물을 콘웰 백작으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가베스턴은 교만하고 오만방자한 성격으로 인해 잉글랜드의 다른 귀족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는데, 국왕의 자문을 독점하는 등 권력욕도 매우 강하여 의회의 반발을 샀고 말았습니다. 결국 1310년, 에드워드 2세의 사촌이기도 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중심으로 귀족세력은 왕이 저지르는 실정과 가베스턴의 국정농단 등을 보다 못하여 왕에 대한 본격적인 견제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의회의 권력을 강화하는 반면에 국왕의 권리는 제한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혁 법령을 발표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가 새로운 법령의 규정을 따르려 하지 않자, 분노한 귀족들은 1312년에 실력행사에 들어갔고. 가베스턴은 귀족들에게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참수형에 처해지고 맙니다. 절친한(동성애?) 사이였던 가베스턴의 죽음을 계기로 에드워드 2세는 귀족들과 의회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되고 맙니다. 그나마 1313년에 왕비 이사벨라가 나서서 에드워드 2세와 귀족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면서 의회는 다시 왕에게 충성을 서약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화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이 가베스턴이란 인물은 ‘브레이브 하트’에도 잠깐 등장하는데(영화 속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 그 당시부터 에드워드 2세의 동성 연인이란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동성애 관계가 사실이었는지는 현재로선 명확히 확인하기 힘들지만 부왕인 에드워드 1세도 이 둘의 관계를 걱정하여 가베스턴을 프랑스로 추방시키기까지 했던건 사실입니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에드워드 1세가 아들의 절친을 궁정 창문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리는 장면은 어디까지나 영화적 허구입니다. 또 하나 영화의 황당한 역사 왜곡이 있는데, 바로 소피 마르소가 연기한 프랑스 출신 왕세자빈 이사벨라가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와 사통을 해 임신을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허구입니다만 아마도 이사벨라가 후일 로저 모티머라는 귀족과 불륜을 저지르는걸 감안한 설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실제 윌리엄 월레스는 이사벨라가 영국으로 시집오기 4년 전에 이미 처형당했습니다.
아무튼 내부적으로 한시적이나마 정치적 안정이 도래하나 싶었으나 1314년 폴커크 전투와 베넉번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는 월등히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의 군대에게 참패를 당하는 결정적 실책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로 인하여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해버렸습니다. 반면에 베넉번 전투에서 승리한 로버트 1세는 끊어졌던 스코틀랜드 왕통을 이어나가는데 성공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 베넉번 전투는 ‘브레이브 하트’ 마지막 장면으로 등장기도 합니다.
베넉번 전투에서의 참패로 에드워드 2세의 정치적 위상은 결국 바닥까지 추락하고 맙니다. 국왕에 대한 의회의 간섭은 더욱 강해졌고, 의회의 리더격이었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국왕의 자문관이 되어 국정을 주도할 수 있는 실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한 토머스와 귀족들 또한 잉글랜드가 처한 난국을 타파할만한 자질은 갖추지 못하였으며 당장 시급한 정치사회적 개혁에도 미온적이었습니다. 1314~1316년에 걸쳐 잉글랜드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세금인상으로 경제와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귀족들간의 내부 분열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318년경에 휴 데스펜서라는 왕의 또 다른 총신이 등장하면서 정국이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가베스턴과는 달리 권모술수와 책략에 능하며 한층 더 교활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휴 데스펜서는 비록 유능하기는 했으나 성격은 야비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정적에게는 자비가 없는 편집증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얻은 이후로 에드워드 2세와의 관계를 악용하여 잉글랜드의 또 다른 실권자로 부상하였습니다. 데스펜서는 관직임명에 관련된 인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사기와 무력행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들의 재산과 영지를 갈취하여 웨일즈 일대에서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처럼 막대한 부와 권력을 쥐게 된 휴 데스펜서가 귀족 세력의 대표주자였던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충돌하게 되리라는 점은 어찌 보면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1321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휴 데스펜서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북쪽 변경의 귀족들과 영주들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군사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에 대해 에드워드 2세는 1322년에 반격을 시도하기 위해 진압군을 거느리고 북진하여 반란군과 충돌했습니다. 결국 이 싸움은 국왕군의 승리로 돌아갔고 반란군은 완벽하게 격파 당하고 맙니다. 주모자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는 사로잡혀 처형당하였으며, 그 외의 주동자들은 전사하거나 혹은 감금, 처형당하였습니다.
이처럼 반란을 진압하고 의회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함으로써 에드워드 2세는 죽은 애인(?) 가베스턴의 복수를 마무리 지었고, 라이벌인 랭커스터 백작과의 오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그를 옥죄던 귀족 의회의 칙령들을 모조리 폐기함으로써 실추된 왕권을 잠시나마 다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이 그로선 가장(유일하게) 빛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에드워드 2세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그의 치세 또한 곧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즉 1322년,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와 함께 반란을 주동하였다가 런던탑에 유폐당하였던 로저 모티머라는 귀족이 잉글랜드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모티머는 이런저런 이유로 국왕과 사이가 멀어져있던 왕이 이사벨라가 영국과 프랑스 양국간 관계 개선을 위해 친정인 프랑스 왕궁으로 돌아오자 그녀와 마음(?)을 맞춰 에드워드 2세에 대한 반란 모의를 하게 됩니다.
마침내 1326년, 왕비 이사벨라와 모티머는 홀란드와 프랑스 왕실로부터 지원받은 병력을 거느리고 잉글랜드에 상륙하기에 이릅니다. 에드워드 2세와 휴 데스펜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력한 왕족들과 귀족들도 이사벨라와 모티머의 반란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미 귀족들에게 버림받은 에드워드 2세는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체포되어 감금당했으며, 휴 데스펜서 또한 어떻게든 사람들을 설득하여 이를 대항하려 했으나 귀족과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바람에 실패하고는 붙잡혀서 참수되기에 이릅니다.
결국 에드워드 2세는 이사벨라와 모티머에 의해 1327년 1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소집된 의회에서 반란에 참여한 귀족들과 주교들에 의해 폐위가 결정되고 아들인 왕세자 에드워드 3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에드워드 3세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위에서 물러난(폐위된) 에드워드 2세는 후에 버클리 성에 감금되었습니다만, 감금당한 지 그리 오래지 않은 1327년 9월 21일,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왕비였던 이사벨라와 그녀의 정부라고 의심되던 모티머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폐위당한 에드워드를 살해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에드워드 2세의 치세는 그야말로 귀족들과 의회와의 피비린내 나는 정쟁, 그리고 외부 세력과의 갈등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특히 후대에 그가 자신의 증조부 존 왕과 더불어 잉글랜드 역사에 있어 대표적 암군의 상징적 인물이 된데엔 로버트 1세에게 패하며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베넉번 전투의 패배가 치명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자신의 부왕이었던 에드워드 1세가 평생에 걸쳐 그리도 그 땅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위해 노력했건만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했음에도 어이없는 패배를 초래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군주로서 갖추어야할 주요한 덕목 중 하나가 우수한 인재 등용이란 점에 있어서도 가베스턴과 데스팬서 같은 무능하고 탐욕적인 이들을 중용함으로써 자신의 치세를 더더욱 얼룩지게 하는 등 전혀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지 못한 모습입니다. 게다가 바람난 마누라와 그녀의 정부에 의해 폐위되기까지 했으니...
물론 에드워드 2세의 치세 중 벌어졌던 귀족들과의 계속된 정쟁이 상당부분 부왕인 에드워드 1세대부터 그 싹이 키워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면 억울한 축면도 없진 않으나 국왕으로써 선정은 거의 보이지 않고 실정이 도드라져 보이는 점 또한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나마 그가 후대에 남긴 유일한 유산이라면 에드워드 3세라는 걸출한 군주를 남겨놓았다는 점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에드워드 3세의 군주로서의 뛰어난 능력은 아무래도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겠지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강한 DNA는 보통 한 대 건너 유전된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물론 명확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아무튼 영토(스코틀랜드)를 상실하고 왕비와 작당한 귀족들의 손에 강제 폐위당한 에드워드 2세... 역시 왕조의 뿌리 같은 지역인 프랑스내 대륙령을 대부분 상실하고 귀족들로부터 군주의 권리를 강하게 압박받게 되는 ‘마그나카르타’에 반강제적으로 서명했던 존 왕과 더불어 잉글랜드 역사상 최악의 군주에 오를만한 인물임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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