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당 후보였던 미국의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70)가 지난 11월 8일(현지시간) 치러진 미 대선에서 경쟁자인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68)을 꺾고 새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미국 내 유력 미디어들은 물론 전 세계 주요 언론사들과 여론조사 기관들에서 대부분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트럼프의 당선 시 통상과 안보 분야에서 큰 부담을 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 우리 한국의 여론도 대부분 클린턴의 승리로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국의 민심은 결국 트럼프를 선택한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현 미국 사회의 다양화와 개방화에 대한 거부이고, 양극화를 초래한 기성 엘리트 체제에 대한 저항입니다.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선거 과정 내내 인종차별적 언행으로 논란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선된 것은 삶의 위기에 봉착한 보수적 백인층이 대대적으로 결집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1960년대 인구의 약 90%가 백인이었던 백인 중심 사회의 미국은 지금은 소수인종이 30%를 넘어가는 다인종사회로 변했습니다. 2030년에는 백인이 인구의 50% 이하로 내려간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중남미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등 소수인종 주민들의 80%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 투표한 반면, 백인들은 60% 이상이 트럼프에 투표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9일(현지시각) 실제 개표 결과를 보면, 위스콘신, 미시간, 인디애나, 오하이오, 펜실베이니아 등 오대호 주변 미국의 전통 공업지대인 ‘러스트 벨트’에 위치한 5개 주가 모두 공화당 트럼프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이들 지역 중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등은 애초 클린턴 후보가 우세할 것으로 전망됐던 지역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승부는 끝이 났습니다. 이 5개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은 모두 75명에 이릅니다. 미시간은 지엠,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 자동차산업 ‘빅3’가 위치해 있고, 위스콘신은 합성 금속 제품을 비롯해 미국 제1의 기계 생산지입니다. 자동차, 철강 등 미국 제조업이 몰락하면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이들 지역의 백인 중·하층 노동자들이 자유무역 반대와 변화를 부르짖는 트럼프에 표를 모아준 것입니다.
미국 사회는 다양화, 개방화가 진행되는 동안 경제적으론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진행됐습니다. 2013년 기준으로 상위 10% 부자가 미국 전체 부의 61.9%를 차지하고, 하위 80%는 부의 26.2%를 점하는 데 그쳤습니다. 중산층(3인 가구 소득 기준 4만2000달러~12만6000달러) 비중도 1971년 61%에서 2015년 50%로 크게 떨어졌습니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아진 백인 중·하류층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적 양극화의 원인을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에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클린턴 부부는 양극화를 초래한 기존 엘리트 계층의 상징으로 부각됐습니다.
백인 중·하층이 밀집한 남부지역도 트럼프가 휩쓸었습니다. 특히 개표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대형주 플로리다(선거인단 29명)에서 트럼프는 49.2%를 얻어 클린턴(47.7%)을 1.5%포인트 차이로 앞서며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애초 플로리다에서 트럼프가 질 경우 트럼프의 당선 확률은 8%에 불과한 것으로 예측됐으나, 플로리다를 얻으면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은 대역전극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클린턴 후보가 선거 전날 밤 마지막 유세를 벌이는 등 갖은 애를 썼던 노스캐롤라이나도 트럼프를 택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클린턴 쪽은 “(서부) 네바다에서 이기면 승리가 가능하다”며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시간, 위스콘신, 그리고 개표 중반까지 클린턴이 앞서나가던 펜실베이니아 등이 잇따라 ‘트럼프 승리’로 넘어가면서 서부로 넘어가기도 전인 동부 개표에서 승부는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이번 대선 결과가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 승리로 결착 지어지며 지난해 4월 12일 “미국인들의 챔피언이 되기를 원한다”며 대권 도전에 나섰던 클린턴은 1년3개월간의 대선 행보를 멈추게 됐습니다. 8일 클린턴이 개표를 지켜보기 위해 찾은 장소는 유리천장으로 덮인 맨해튼의 ‘재비츠 컨벤션 센터’였습니다(이 장소는 저도 예전 미국에서 학교 졸업 후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일 년에 한번 씩 행사참여를 했던 곳이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클린턴은 당초 이곳에서 지지자들과 당선 승리 파티를 열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의 패색이 짙어지자 존 포데스타 선거대책본부장은 “오늘 밤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며 귀가를 독려했습니다. 클린턴은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대신 당선이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에게 전화해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지난해 4월 클린턴이 대선 출마 선언을 했을 때만 해도 미국 내 여론에서 클린턴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은 누구보다도 높았습니다(물론 저는 그 반대였습니다. 즉 어지간한 공화당 후보라면 클린턴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상대가 트럼프가 되며 혹 클린턴이 승리 할 수도 있겠다로 바뀌었습니다만...). 인권 변호사에서 주지사 부인을 거쳐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독자적 정치가의 길을 나선 뒤 연방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을 거친 화려한 경력의 클린턴은 분명 대세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6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에서 드러난 엘리트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라는 세계적 흐름은 클린턴의 대통령 꿈을 좌절시키고 말았습니다. 미국인들은 막말과 여성 비하 등의 단점에도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를 선택했습니다.
1947년 평범한 사업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클린턴은 미 동부 명문인 웰즐리여대와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거쳤습니다. 그러나 클린턴에게 각인된 ‘잘나가는 기득권 엘리트’라는 이미지는 ‘변화’를 원하는 미국인들 앞에서 최대 장애물이 됐습니다. 선거 전날까지도 클린턴은 줄곧 40~50%대의 지지율을 보이며 트럼프를 앞섰지만 비호감도도 줄곧 50~60%를 기록해 왔습니다. 자유무역으로 피해를 본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은 클린턴 대신 트럼프에게 표를 줬습니다.
국무장관 시절 사설 e메일 서버로 기밀이 포함된 공무를 처리한 ‘e메일 스캔들’로 클린턴은 ‘거짓말쟁이’ 딱지도 얻었습니다. 2013년 월가 투자은행 골드먼삭스에서 세 차례 실시한 비공개 강연으로 67만5000달러(약 7억7000만원)의 고액 강연료를 받은 점과 2001년 이후 클린턴 부부가 15년간 2억 달러(2296억원)의 부를 축적한 부분도 서민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부분이었습니다.
점점 커지고 있는 사회 불평등과 소득 양극화도 민주당 정권에 대한 반감을 키웠습니다. CNN이 실시한 대선 출구조사에서 유권자 10명 중 4명은 “변화를 원한다”고 답했고 10명 중 7명은 “정부가 일하는 방식에 만족하지 않거나 화가 난다”고 응답했습니다. 미시간·위스콘신주 같은 민주당 우세 지역에서도 표를 잃은 클린턴은 경쟁자 트럼프의 여성 비하 발언과 잇따른 성추행 의혹에도 여성 유권자 공략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유리천장’을 깨겠다고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투표조사 결과 그를 찍은 여성은 전체의 54%에 그쳤습니다. 여성 대권 후보였지만 자신의 최대 지지 세력이었어야 할 여성 유권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위에서도 어느정도 설명되었지만, 이번 미국의 대선 결과를 이야기하면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바로 백인, 그 중에서도 백인남성들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반감과 불만입니다. 지난 2008년 대선에서 흑인이었던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미국은 큰 변화를 맞는 듯 했습니다. 다민족·다문화 국가라고는 하나 백인들이 절대적으로 기득권을 움켜쥔 나라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배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수많은 백인들이 흑인 후보에게 표를 주었습니다. 이로서 미국은 ‘인종차별’이라는 큰 허들 하나를 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 오바마 후보가 공화당 존 맥케인 후보를 상대로 거둔 큰 승리에는 절대적으로 2007년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의 여파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사실 민주당 후보가 누가 나오든 당시 집권당이었던 공화당 후보가 승리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물론 흑인 후보 오바마를 절대적으로 지지한 젊은층(밀레니엄 세대)의 정치참여는 눈여겨볼 점이긴 하나 오바마 승리의 최대 요인은 ‘제2의 대 공황‘이라 불린 경제적 위기감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의식한 듯 오바마는 백악관에 입성한 뒤 미국 내 제조업 부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오바마 집권8년 간 일면성과를 거둔 듯도 했습니다. 투기 자본이 설치는 주식·채권시장과 눈에 보이는 경제 지표상으론 말입니다. 하지만 노동자 계층들이 실감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입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차곡차곡 쌓여만 가던 백인, 특히 그 중에서도 중·하층 백인남성들의 불만은 공화당후보 트럼프의 입을 통해 여과 없이 표출되었습니다. 트럼프의 차별성 발언들을 내뱉은 대상인 히스페닉이나 무슬림, 더 나아가 여성들은 그들 입장에선 나하곤 상관없는 ‘남’이었습니다. 그들을 제아무리 욕하고 차별한들 ‘내일’이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TPP 등과 같은 자유무역 협정들을 비난하는 트럼프는 경제적 빈곤감에 시달리던 그들의 기존 정치권과 인물들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또 하나 말하기 조심스런 점이 있습니다. 바로 여성 후보 클린턴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주류 언론에서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미국 사회는 양성평등이 상당히 높게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면 맞는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는 혹은 제도상으론 말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절대적으로 백인 남성들이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사회에서 흑인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던건 어디까지나 ‘금융위기’란 허리케인급 정치적·경제적 격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바마는 비록 흑인이지만 남성입니다. 겉으론 여성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은 것처럼 비쳐지나 백인 남성들의 마음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엔 ‘흑인 대통령을 8년 참았는데 이젠 여성 대통령이라고?’라는 외침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게다가 여성 후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라면... 이 부분에서 백인남성에 더해 백인 여성들까지 포함된 반(反)클린턴 진영이 형성되기에 이릅니다.
지난 2000년 대선과 함께 치러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클린턴이 출마했을 시 당시 뉴욕시와 뉴욕주의 여론은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당시 제가 뉴욕과 보스턴에서 생활했던지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절대적 안티로 갈리었던 것입니다. 비록 무명의 경쟁자(젊은 하원의원)를 상대해 55%의 지지율로 선거에 승리하긴 했으나 만약 이번 트럼프 캠프에서 주요인물로 활약한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이 그때 출마했더라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남편 빌 클린턴의 1992년 대선 출마시절부터 많은 안티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여성층에서 말입니다. 시작은 1982년 빌 클린턴의 아칸소 주지사 출마 시 이름을 힐러리 로댐에서 힐러리 로댐 클린턴으로 고친 것입니다. 미국은 일반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면 부인은 남편의 성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힐러리 클린턴은 1975년 결혼 후에도 1982년까지 로댐이라는 원래 성을 계속 써 왔던 것입니다. 미국 내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종종 있던 일입니다. 이것이 92년 대선에서 하나의 가십성 논란이 되었습니다. 특히 당시 상대 후보였던 현직 대통령 조지 H. 부시의 부인 바바라 부시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비쳐졌음으로 더더욱 이 부분이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지금과는 시대가 다른 24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1993년 영부인이 된뒤 대통령인 남편에 의해 ‘국민건강보험’ 개정에 대한 일을 맡으며 백악관 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서관(West Wing)에 자신의 사무실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업무에 매진하게 됩니다. 이때 결정적으로 그에 대한 안티세력이 형성되게 됩니다. 가뜩이나 전통적 영부인상과는 다른 파격적 이미지를 가진 것에 더해 본격적으로 국정업무까지 참여하게 되었으니 보수진영은 물론 상당수 여성층에서도 심한 거부감이 표출된 것입니다. 물론 반대편에선 성공적인 ‘커리어 우먼’의 표상으로 절대적 지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이번 대선에서 클린턴이 여성 후보이면서도 여성층에서 절대적 지지를 얻지 못했던 이면엔 이런 배경들이 작용했습니다. 더욱이 상대가 여성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트럼프였음에도 말입니다. 미국 내 백인남성은 물론 백인여성층에서 그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큰지를 선거 결과가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클린턴은 또한 백인들의 지지를 크게 놓친데 이어 젊은층(밀레니엄 세대)의 지지도 이끌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클린턴은 소속 정당만 민주당 일뿐 대표적 보수·기득권층의 일부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미국 사회의 변화를 막는 일시적 역류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조류가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국 사회는 클린턴 당선 때보다도 더 극렬한 정치적 양극화를 겪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미국의 기성 엘리트 및 진보적 계층과 집단, 소수인종들이 트럼프에 갖는 혐오와 불안감은 보수적 백인 계층들이 클린턴에 대해 갖는 것 이상입니다. 경제적 양극화에 고통 받는 미국 사회는 그 대안으로 ‘트럼프’를 택했지만, 트럼프는 기존 양극화를 해결하기도 전에, 또 다른 정치적 양극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대선이 끝난 지 3일이나 지났지만 미국 내 대도시 곳곳에선 반(反)트럼프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대통령 트럼프’가 반으로 극명히 갈려진 미국 사회를 어찌 화합으로 이끌어 갈지, 그리고 그의 당선으로 힘을 얻어가는 ‘백인우선주의’를 어찌 건강한 방향으로 해결할지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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