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완전히 폐기했다고 공식 발표한 가운데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던 역사적 북미정상회담이 전격 취소되어 많은 이들이 놀라움에 빠졌습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 홈페이지를 통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서신에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은 북한의 '엄청난 분노와 노골적인 적개심' 때문에 "적절치 않다(inappropriate)"면서 이를 취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서신에서 언급한 북한의 '커다란 분노와 드러난 적개심'은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성명입니다. 최 부상은 이날 앞서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한 담화에서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무도하게 나올 경우 나는 조미수뇌회담을 재고려하는 것에 대해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 부상은 이날 "미국이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 부상은 "미국 부 대통령 펜스는 지난 21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조선이 리비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느니, 북조선에 대한 군사적 선택안은 배제된 적이 없다느니,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느니 뭐니 하고 횡설수설하며 주제넘게 놀아댔다"고 비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회담 취소결정은 북한이 '선 비핵화 후 보상' 등을 골자로 한 미국의 비핵화 방식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미국의 대북정책 핵심 참모들을 겨냥한 날 선 비난을 쏟아내며 배수진을 치자 오히려 한발 더 나가는 초강수를 둔 것으로 풀이됩니다. 강대강 국면에서 압박하는 스탠스로 다시 북한을 상대하겠다는 것입니다.
북미 회담을 갖기로 한 뒤 백악관은 평양을 향해 “체제 보장을 할 수 있다”, “한국 수준의 번영” 등의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지만 북한이 오히려 더 강경하게 나왔다고 본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화를 갖는다 해도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이끌어낼 수 없다고 트럼프 대통령은 최종 판단했다는 분석입니다.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는 22일(현지 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어느 정도 감지됐습니다. 당시 그는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회담을 안 할 것이다. 6월 정상회담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처음으로 북-미 정상회담 취소 가능성을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더 강경하게 나오자 결국 회담 취소라는 ‘초강수’를 뽑아든 것으로 보입니다.
당초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 같았던 북미정상회담 일정조율 과정에서 북미 간 기류가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이달 중순께부터입니다. 지난 9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3월에 이어 두 번째로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을 만났을 당시만 하더라고 양측은 '새로운 대안'에 관한 '만족한 결과'를 이룩했다고 발표하며 긍정적 메시지를 발신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억류됐던 한국계 미국인 3명도 석방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이오 방북 결과를 보고받은 후 북미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16일부터 이상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이날 남북 고위급회담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데 이어 같은 날 오전에는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담화를 통해 "미국에서 망발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다"며 불쾌함을 드러냈습니다. 이 담화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선 핵포기 후 보상' 발언 등을 문제삼으며 "대국들에 나라를 내맡기고 붕괴된 리비아나 이라크의 운명을 우리 국가에 강요하려는 불순한 기도의 발현"이라고 규탄했습니다. 나아가 볼턴 보좌관에 관해 '거부감'을 숨기지 않으며 "미국은 우리의 아량과 대범한 (비핵화 관련) 조치들을 나약성의 표현으로 오판하며 저들의 제재압박공세의 결과로 포장하려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북한은 지난달 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의 승리적 결속을 선포하며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결정했던 북한 입장에서는 내부적으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참모들을 중심으로 북한의 비핵화 약속이 제재와 압박의 성과라는 식의 주장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북한 입장에서는 이를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지난 21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비핵화 합의를 하지 않으면 김정은 정권은 리비아처럼 끝날 거라고 호언했습니다.
이에 북한도 대응 수위를 끌어올렸습니다. 북한은 24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 명의의 담화에서 "비극적 말로를 걸은 리비아와 비교하는 것을 보면 미국 고위정객들이 우리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들의 말을 되받아넘긴다면 우리도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고 응수했습니다. 이 담화는 나아가 "미국이 우리와 마주앉지 않겠다면 구태여 붙잡지 않을 것"이라며 배수진을 쳤습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최 부상의 담화가 발표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지금으로선 오랫동안 계획된 이번 만남을 갖는 게 부적절하다고 느낀다"라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음에도 정상회담을 추진해왔으나, 북한이 주도권을 잡고 가려고 하는 상황에서 이번에 '비핵화'에 합의하더라고 향후 이행 과정에서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이 미국의 압박 정책에 반응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내부적으로 권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비핵화'를 추진해야 하지만, 미국 측에서 제시하는 '선 비핵화 후 보상' 방식은 앞서 선전했던 '핵-경제 병진노선의 승리적 결속'을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북한이 이를 수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관측입니다. 북미간 신경전이 다시 복잡한 방정식 문제로 접어든 느낌입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취소 방침을 밝히면서 청와대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22일 미국 워싱턴DC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북미정상회담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노력하기로 뜻을 모은 지 불과 하루 만에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입장이 발표되면서 청와대가 느끼는 충격이 한층 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이 공개되자 전혀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의겸 대변인은 서한이 공개된 후 30여분이 지나서야 “트럼프 대통령의 뜻이 무엇인지,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시도 중”이라는 짧은 입장을 밝혔을 뿐 그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관계자들 역시 “일단은 정확한 사태 파악이 우선”이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알 방법이 제한적인 만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는 적잖게 어려움을 겪는 분위기였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밤 11시30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멤버인 임종석 비서실장, 정의용 안보실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조명균 통일부 장관, 송영무 국방부 장관, 서훈 국정원장,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을 청와대 관저로 긴급 소집했습니다. 청와대는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취소 결정 배경을 비롯한 현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향후 대책을 수립하는 데 주력할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한다고 발표한 것과 관련해 "깊은 우려"를 피력했습니다. 구테흐스 총장은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자의 회담의 철회에 크게 우려하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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