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77)이 23일 새벽 뇌물수수 등 10여 가지 혐의로 서울동부구치소에 구속 수감됐습니다. 2013년 2월 퇴임한 지 5년 1개월 만의 일입니다. 이로써 이 전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전 대통령(66·구속 기소)에 이어 대한민국 헌정사상 부패 혐의로 구속 수감된 네 번째 전직 대통령이 됐습니다. 또한 1995년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함께 구속 수감됐던 데 이어 박, 이 두 전직 대통령이 동시에 수감되는 역사가 재연됐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그동안 110억 원대 뇌물수수와·350억 원대 다스 횡령 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아왔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박범석 부장판사는 22일 오후 11시 6분께 서울중앙지검이 청구한 이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포기함에 따라 법원은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서와 의견서, 변호인 의견서 등 서류를 검토해 영장 발부를 결정했습니다. 박 부장판사는 "범죄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소명이 있고, 피의자의 지위, 범죄의 중대성 및 이 사건 수사과정에 나타난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으므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타당성)이 인정된다"고 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대기하다 서울중앙지검 신봉수 첨단범죄수사1부장과 송경호 특수2부장에 의해 서울 송파구 문정동 서울동부구치소로 이송돼 23일 0시 18분 수감됐습니다. 법무부는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박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는 점을 감안해 이 전 대통령을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구치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수의로 갈아입은 뒤 약 10m² 크기의 독방에 수용됐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 집행 직전 페이스북을 통해 “누굴 원망하기보다 이 모든 것은 내 탓이라는 심정이고, 자책감을 느낀다”며 “언젠가 나의 참모습을 되찾고 할 말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나는 그래도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이 전 대통령은 뇌물수수, 횡령, 조세포탈, 직권남용 등 14개 안팎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우선 그는 국가정보원에서 7억 원의 특수활동비를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를 받고 있습니다. 검찰은 지난 5일 국정원 특활비 수수 창구 역할을 한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을 구속기소하면서 이 전 대통령을 '주범'으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또 삼성전자로부터 다스의 미국 소송비 585만 달러(68억원)를 받은 것을 비롯해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22억5천만원), 대보그룹(5억원), 김소남 전 의원(4억원), ABC상사(2억원), 능인선원(2억원)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도 있습니다. 뇌물수수 혐의액은 총 111억 원에 달합니다. 아울러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이 실소유주인 다스에서 1991년부터 2007년까지 339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빼돌리는 등 총 350억 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청와대 등 국가기관을 동원해 다스의 미국 소송을 돕게 하고 처남 고 김재정씨 사망 이후 상속 시나리오를 검토하게 한 혐의(직권남용), 청와대 문건 무단 유출·은닉(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도 포함했습니다.
사실 이 전 대통령은 11년 전에도 다스 관련 의혹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 됐었습니다. 또한 제17대 대통령선거 후 출범했던 특검의 수사 결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검찰은 다스 실소유주로 이 전 대통령을 적시하며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그리고 법원은 22일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결국 23일 새벽 이 전 대통령은 구속되었습니다.
10년 전과 다르게 검찰이 수사가 정반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전 대통령 측근들의 달라진 증언의 영향이 컸다는게 법조계와 정치권의 분석입니다. 수사 초반에는 관련 혐의 등을 부인하던 측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방향으로 자세를 바꿨다는 것입니다.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은 이 전 대통령과 고려대 상대 동문으로 청와대 안살림을 총괄하고 개인 자산과 사적인 업무를 도맡아 '집사'로 불려왔습니다. 하지만 김 전 기획관은 검찰의 칼날이 조여오자 수사에 결정적 진술을 쏟아냈습니다. 검찰은 김 전 기획관을 기소하며 공소장에 김 전 기획관을 주범이 아닌 조력자로, 사건의 주범으로 이 전 대통령을 명시했습니다.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도 2011년 10월 미국 순방을 앞두고 국정원 특활비 1억 원을 이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를 보좌하던 행정관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김 전 실장도 자금과 관련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던 인물이기에 이와 같은 증언은 이 전 대통령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습니다.
이외에도 이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사장 시절 같이 근무했던 김성우 전 다스 사장은 다스 설립에 이 전 대통령의 관여가 있었다는 취지의 자수서를 검찰에 제출했습니다. 이병모 청계재단 사무국장도 구속 후 차명재산 관리 및 보고 사실을 인정하는 등 검찰 조사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스 서울 사무실이 위치한 이 전 대통령 소유의 서초동 영포빌딩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다스 소송비 관련 문건 등 청와대에서 몰래 가져 온 것으로 의심받는 기록물도 검찰 수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검찰은 두 차례 압수수색 결과 청와대에서 생산된 대통령기록물 수십 박스를 발견했습니다. 이외에도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다스 관련 보고를 받았다는 증거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성의 다스 소송비 대납 관련 문건도 영포빌딩에서 발견됐습니다.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2009년 다스의 미국 소송과 관련해 변호사 비용을 대납했다는 혐의를 인정하는 취지의 자수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은 앞으로 최장 20일까지 이 전 대통령의 신병을 확보한 상태에서 영장 범죄 의혹을 보강 조사하는 한편, 현대건설 2억 원 뇌물수수 등 추가 수사가 필요해 아직 구속영장에 담지 않은 나머지 혐의로 수사 범위를 넓힐 계획이라고 합니다. 검찰이 광범위한 추가 수사 필요성을 언급하는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의 기소 시점은 구속 만기인 4월 10일께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미 6월 지방선거전이 본격화한 가운데 검찰이 선거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달 말 또는 내달 초순으로 기소 시점을 앞당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의 경호 문제 등을 고려해 향후 박 전 대통령 때와 마찬가지로 구치소에 찾아가 이 전 대통령을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때 ‘샐러리맨의 신화’란 칭송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지만 ‘대통령직 퇴임 후 구속’이란 절대 자랑스럽지 못한 한국 정치의 전통(?)을 따라 결국 그도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그의 인생여정을 살펴보자면, 이 전 대통령은 부모가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던 중,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에서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때 지어진 일본식 이름이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고 전해집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자수성가로 조선에 있던 친척도 불러오는 등 나름대로 괜찮게 생활했던 걸로 전해집니다. 그 뒤 아버지가 일가친척의 목장 일을 봐주게 되어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읍 덕성리에 살게 됩니다. 현재 그곳에 '이명박 대통령 고향집'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포항시내로 이사했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시기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으로 인해 이 전 대통령은 누나와 남동생을 잃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야간 상고인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간의 입시 준비 끝에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한편 이 입시 준비라는 것이, 낮에는 일당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노동자 합숙소 구석에서 작은 불을 켜 공부를 하는 것이었고 때문에 당연히 같이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밤에는 불 끄고 잠좀 자자"며 호통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이후 고려대 재학 시절에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하다 체포당해 투옥되었고, 소요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시기에 박근혜 캠프가 상대 후보인 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것을 최초로 주장하였으나, 그에 대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대선 후보 등록시에 전술한 전과를 누락하여 전과는 없는 것으로 신고하여 허위신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체포된 해 12월 15일, 어머니는 심장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뒤 이 전 대통령 인생 최대의 화려한 시절이라 할 수 있는 현대건설에서의 샐러리맨 시절이 펼쳐집니다. 즉 그는 1965년, 현대건설의 재정/경리과에 입사하게 됩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운동 전력으로 취업길이 막막해져 현대건설 필기시험에 합격 했는데도 최종입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어, 박정희 대통령이 민정 비서관 이낙선을 보낸 자리에서 청와대에서 현대건설에 최종합격을 통보했다고 한다고 하는데, 후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오히려 정주영 회장에게 '이명박을 조심하라' 라고 경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주영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말을 오해(잘 봐줘라)하고, 전격 지원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가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입사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30세에 이사, 37세에 사장, 48세에 현대건설 회장까지 올랐습니다. 그야말로 ‘샐러리맨의 신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1992년 회장직에서 퇴임 후 정계에 진출했는데, 그가 입당한 당은 당시 정주영이 창당했던 통일국민당이 아닌 민주자유당이었으며, 이 때문에 정주영 명예 회장과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합니다. 즉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통일국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시 이전 대통령은 경제 관련 전문가 영입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에 출마함으로써, 정주영 일가와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집니다. 이 전 대통령은 해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합니다.
1995년 국회의원 임기가 1년 남은 상황에서 같은 해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치러진 제1기 민선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민주자유당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최종경선에서 결국 정원식 전 총리에게 패배합니다. 그 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종로에서 11~14대 종로구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찬, 그리고 ‘청문회 스타’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그가 선거비용을 거짓 신고했다고 언론에 폭로하고, 이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그를 외국으로 도피시켰던 사실까지 밝혀지자, 형이 내려지기 직전 자진 사퇴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해당 지역구에서는 1998년 재·보궐선거가 실시되었고, 노무현 후보가 다시 도전하여 당선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1998년 3월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이전 대통령은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이어 서울 고등법원에서열린 항소심에서 선거법위반 혐의로 벌금 400만 원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99년 4월 대법원은 선거법 위반 혐의와 이명박의 범인 김유찬 도피 혐의에 대한 유죄를 확정하고 7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로써 이 전 대통령은 그해 3년 전에 국회의원 피 선거권을 박탈당했지만, 1년 후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 됩니다.
피 선거권이 회복된 것을 계기로, 이 전 대통령은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출마하였습니다. 당시 여당의 후보는 당시 떠오르던 정치인 김민석이었는데, 여론조사에서는 오차범위 내로 상당히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김민석으로부터 과거의 여러 의혹을 제기 받아 이때부터 과거 비리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공약으로 내걸어 일찌감치 분위기를 잡았고, 후보토론에서도 판정승을 거두며 52%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의 두 번째 전성기의 시작 인 것입니다.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생겨난 별명은 ‘불도저 시장’으로 특유의 추진력으로, 그리고 현대건설 CEO 경력을 살려서 토목·건축적인 정책을 밀고 나가 서울 외관을 바꿨다고 해서 생겨난 별명입니다.
성공적인 시장 경력을 계기로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그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당시 상황은 참여정부 동안의 민생, 경제 파탄과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정권 심판론이 매우 우세했고, 정권의 임기 막판의 지지율 저하와 민주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및 당시 분열과 막장을 보여주던 여당 대통합민주신당의 바닥을 찌르는 지지율로 인해 후보선출 이전부터 보수계 정당인 한나라당 소속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기정사실화될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인지 사실상 한나라당 경선만 뚫으면 사실상 17대 대통령이 된 거라는 말까지 나오는 등 대선 본선보다도 한나라당의 경선이 더 치열해지는 양상이 발생했는데,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박근혜 후보와의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발생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여론 지지도, 박근혜는 당내 지지도가 우세했는데, 경선 룰에 따라서 승부가 뒤집어질 수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습니다.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네거티브로 인해 둘의 과거 비리는 이때 대부분 드러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북핵 실험 등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한 사건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고, 이 전 대통령은 혈투 끝에 우세했던 여론 지지율을 앞세워 경선에서 승리하여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본선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과 사실상의 일대일 대결을 벌이게 되었는데, 말이 좋아 매치였지 지지율이 2배 이상 차이나는 거의 이명박 후보의 독주체제였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변수가 생겼으니, 이회창 전 대표의 한나라당 탈당 및 후보 독자출마였습니다. 같은 보수성향에다 당의 후광이 없어도 네임밸류가 컸던 정치인이기에 표가 분산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풍은 오래가지 못하고 지지율면에서 정동영후보의 지지율은 이명박의 절반, 이회창은 정동영 후보의 절반의 양상이 고정되었습니다. 정동영 후보측은 BBK 주가조작 사건을 내세우며 이명박 후보를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이 후보는 747 공약과 대운하 공사를 내세워 마이페이스를 걸어갔고 결국 지지율은 득표율로 그대로 연결되어 여유롭게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이 전 대통령은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을 거치며 5년의 임기를 마치고 2013년 2월 퇴임하였지만 퇴임 5년 1개월 만인 2018년 3월 23일, 결국 대한민국 헌정사상 네 번째로 법정 구속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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