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을 위한 헌법 수정안을 의결할 제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지난 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이번 ‘전인대’는 국가주석직 2연임(10년) 초과 금지 조항을 삭제하고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을 헌법 서문에 담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 리커창 총리의 1시간 50분에 이르는 정부 업무보고에 이어 왕천 전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의 헌법 수정안에 대한 설명도 이뤄졌습니다. ‘전인대’는 오는 11일 헌법 수정안에 대해 투표할 예정이지만 지금껏 중국의 국회 격인 전인대가 공산당 결정에 반대한 사례가 없어 무사통과될 전망입니다.
리 총리는 정부 업무보고에서 “수많은 모순이 얽힌 상황에서 이룬 개혁과 발전의 성과는 시진핑 사상이 과학적으로 지도한 결과”라며 ‘안불망위 흥불망우’(安不忘危 興不忘憂·편안할 때도 위기의식을 잃지 말고 성공했을 때도 우환의식을 잃지 말아야 한다)를 강조했습니다. 이어 중국은 앞으로도 장기간 사회주의 초급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세계에서 제일 큰 개발도상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리 총리는 중국중앙(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생중계된 두 시간여 업무보고에서 ‘시진핑’과 ‘시진핑 사상’을 각각 6차례와 5차례 언급했습니다.
개헌 초안은 헌법 서문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3개 대표론의 지도를 지켜 나가는 것”이라는 문구에 “과학발전관과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삽입됩니다. 3개 대표론과 과학발전관은 각각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이념으로 두 사람은 헌법에 이름까지는 올리지 못했습니다. 시 주석의 15년 이상 장기 집권을 보장할 헌법 3장 제79조 3항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 부주석의 매회 임기는 ‘전인대’ 대회 매회 임기와 같고 임기는 두 번 연속 회기를 초과하지 못한다”란 조항에서 임기 제한 규정을 삭제하게 됩니다.
‘전인대’ 상무위는 건의서에서 “중국 공산당 당헌에는 당 중앙위 총서기와 당 군사위원회 주석 그리고 헌법에는 군사위원회 주석이 2회기를 넘어 연임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없다”며 “헌법이 3연임 제한 철폐란 규정을 채택하는 것은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국가 영도 체계를 강화하고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개헌안에는 공산당원뿐 아니라 공무원까지 모두 감독하는 국가감찰위원회 설립도 포함돼 시진핑 집권 2기의 반부패 작업을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시 주석 집권 5년 동안 반부패 활동으로 440명의 장관급 이상 공무원들이 관직과 공산당원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파면당한 장군의 숫자는 1949년 공산당이 집권하기까지 전투에서 사망한 별들의 수보다 많습니다.
중앙기율위를 이끌며 ‘2인자’로 시 주석을 보좌한 왕치산 전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기율위 서기는 이날 ‘전인대’에서 시 주석 왼쪽 다섯 번째 자리에 앉았습니다. 왕 전 상무위원은 국가부주석직을 맡아 미국과의 무역전쟁에 대처하는 등 집권 2기의 해결사로 나설 예정으로 전망됩니다. 왕 전 서기는 현재 70세로 그의 기용은 시 주석이 집권 2기를 앞두고 후계자를 선정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의 원칙뿐 아니라 ‘7상8하’(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한다)의 금기마저 깼음을 뜻합니다.
시 주석 오른쪽 여섯 번째 자리에 앉은 류허는 인민은행 총재와 경제부총리직을 맡아 경제부문 2인자로 일하게 됩니다. 류는 지난주 방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전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리 총리는 업무보고에서 “중국은 평등협상을 통해 무역 분쟁을 해결할 것을 주장하고 보호무역주의를 반대하며 자국의 합법적 권익을 결연히 수호해야 한다”고 내세웠습니다. ‘자유무역 수호자’로 중국이 나섰음을 선언하며 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관련 협상을 조기에 타결하고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구와 동아시아경제공동체 건설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경제 분야와 관련해 리커창 중국 총리는 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인대’ 정부 업무 보고에서 작년 경제성장률 6.9%보다 0.4%포인트 낮은 '6.5% 정도'의 올해 성장률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작년 3월 ‘전인대’에서 중국 정부가 제시했던 2017년 목표치 '6.5% 혹은 그 이상'에서 '그 이상'이라는 단서를 뺀 것입니다.
리 총리는 "올해 성장률 목표는 중국 경제가 고속 성장 단계에서 질 높은 성장 단계로 방향을 전환하는 현실에 부합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GDP 대비 재정 적자 비율도 지난해 3%에서 올해 2.6%로 낮춰 잡았습니다. 지난해 중국 경제는 당초 전망을 깨고 6.9% 성장, 2010년 이후 7년 만에 처음으로 성장률이 반등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무리하지 않고 내실을 다지겠다는 것입니다.
리 총리가 제시한 '질 높은 성장'은 부채와 수출 주도로 경제 외형을 키워온 '양적 성장'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빈부 격차 확대, 환경오염, 금융 리스크, 성장률 부풀리기 같은 각종 부작용을 불러온 지난 40년간의 경제 운용 패러다임을 이제 바꾸겠다는 의미입니다. 리 총리는 질 높은 성장을 구현하기 위한 세 가지 특별 과제로 리스크 방지, 탈빈곤, 오염 방지를 제시했습니다. 특히 오염 방지 분야 투자를 19% 증가시켜 오염 물질과 초미세 먼지 농도를 낮추는 '푸른 하늘 수호전(藍天保衛戰)'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리 총리는 또 외국 쓰레기 반입을 엄격히 금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경제성보다는 환경을 더 우위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중국 경제의 이 같은 '중속·질적 성장' 추구는 기업에 대한 환경 규제 강화로 이어질 전망입니다. 중국 진출 제조업체에는 상당한 비용 부담 요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블룸버그는 "질적 성장으로 인해 중국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가 약화될 것"이라며 "대중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라고 전했습니다. 한국은 대표적으로 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여서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리 총리는 또한 ‘전인대’ 업무 보고에서 국방 분야와 관련해선 "중국 특색의 강군의 길로 나아가고 군대 훈련과 전쟁 대비 사업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겠다"며 "강대하고 든든한 현대 국경방위, 해안방위, 영공방위 능력을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국방예산은 2011~2015년 5년 연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며 가파르게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2016년 증가율이 7.6%를 기록하며 한 자릿수로 떨어진 뒤 2017년에는 7%로 29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이 작년 10월 중국 공산당 19차 당 대회에서 '2050년 세계 일류군대'를 국가지표로 제시하자, 중국 정부가 시 주석의 강군몽(强軍夢)을 뒷받침할 팽창 예산을 편성한 것입니다.
최근 수년간 중국은 위협적인 군비 확장으로 주변국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육군을 중심으로 30만 명 이상 감축하는 대신 해·공군력을 현대화해 중국의 군사력을 해외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하는 게 그 핵심입니다. 중국은 미국의 전유물이었던 첨단 무기 분야에서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중국 해군은 전자기력을 이용해 포탄을 음속의 최고 7배 속도로 발사할 수 있는 레일건을 일부 함정에 장착했습니다. 중국 공군도 독자 개발한 스텔스 전투기인 '젠-20'을 자국 내 3개 공군 기지에 실전 배치했습니다.
현재 중국의 국방예산은 세계 2위입니다. 1위인 미국 올해 국방예산 6920억 달러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합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도 1.3%로 3%대인 미국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CSIS(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중국 정부가 공개하는 국방예산은 다른 나라의 국방예산에는 포함되는 항목들이 누락돼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정부의 각종 지원금, 전략미사일 부대 및 핵 운용 부대 관련 자금, 우주프로그램 예산, 지방전구(戰區) 운용 비용 등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숨은 예산'을 포함하면 중국의 실제 군사비는 공개된 수치보다 55% 더 많은 300조원에 이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이럴 경우 우리 국방 예산의 6배 이상이 됩니다.
중국의 군비 확대는 미국과 일본의 국방예산 확대와 맞물려 전 세계 군비 경쟁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내년 국방예산으로 올해보다 7.2% 늘어난 7160억 달러를 의회에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6년째 방위비를 계속 늘리고 있는 일본도 역대 최대인 5조1911억 엔(약 52조5345억원)의 올해 국방예산을 편성했습니다.
한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 추진을 놓고 글로벌 학계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5일 보도했습니다. 위에서도 부연했듯 5일 개막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즉 ‘전인대’는 중국 헌법에서 '국가주석직 2연임 초과 금지' 조항을 삭제해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개헌 전 중국 지도자의 임기는 10년으로 제한됐으나, 개헌 후에는 원칙적으로 '종신집권'도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 주석의 장기집권 추진을 비판하는 진영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법치주의의 붕괴, 1인 독재로의 회귀를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데이비드 섐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는 "장기집권 추진은 권력의 개인화를 초래할 것"이라며 "정치 엘리트의 권력을 제한하고 규제하기 위해 세웠던 원칙이 하나둘씩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어 "덩샤오핑은 1978년 이후 중국 정치를 제도화하고자 많은 애를 썼으나, 2012년 집권한 시진핑은 이를 되돌리고 있다"며 "(장기집권 추진은) 중국 정치의 제도화를 퇴보시키는 조치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삼엄한 사상 통제를 받는 중국 내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천제런 중국정법대학 교수는 "우리는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많은 인재가 중국 내에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며 "중국의 운명을 한 사람이나 소수에 맡기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중국 인민에 대한 불신을 의미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시 주석의 장기집권이 초래할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비판 세력의 실종과 이로 인한 정책 리스크의 확대가 꼽혔습니다. 미 컬럼비아대학의 앤드루 네이선 교수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그가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사람들이 지도자의 정책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할 때 정책 실패의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고 말했습니다. 미 키신저 중국연구소의 로버트 데일리 소장은 "지식인과 지방 관료의 침묵은 정책 성공을 위해 필요한 지방 정부와 시민사회, 기업 등의 피드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적 견해가 서구 지식인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에서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반부패 사정, 경제 개혁, 부채 문제 해소, 빈곤 퇴치, 글로벌 무대의 영향력 확대 등 시 주석의 장기집권을 옹호하고자 중국 관영 매체가 내세우는 논리가 허구에 기반을 둔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미 하버드대학의 에즈라 보겔 교수는 "시진핑의 장기집권은 그의 반부패 사정에 적대감을 품은 세력이 저항하거나, 정권을 잡는 것을 막으려는 측면이 있다"며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우려로 인해 시진핑은 현재와 미래의 그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런던 킹스칼리지의 케리 브라운 교수는 시 주석의 당내 권위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브라운 교수는 "시진핑과 당 지도부는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며 "어떠한 중국인도 중국이 국력이 약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시진핑은 뚜렷한 목적성, 안정성, 확실성을 지향하면서 중국의 미래에 대한 역동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면서 "(장기집권 추진은)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권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다만 권력의 집중이 가져올 문제도 분명히 존재하는 만큼, 정책 결정과 지도부 인선의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현대판 ‘시황제’란 별칭을 얻으며 장기 집권의 길로 들어선 시진핑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시 주석은 베이징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섬서성의 토착 공산주의자로 류즈단(劉志丹)과 함께 해방구를 건설했는데, 중국 최남단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가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붕괴하면서 공산당 지도부가 대장정으로 섬서성으로 피신해오자, 시중쉰은 혁명의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공로로 일약 당고위직에 진입했습니다. 시중쉰은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와 결혼했다가 1남 2녀를 낳고 1943년 이혼을 하고, 1944년 치신과 재혼했습니다. 시중쉰은 치신과 2남 2녀를 두는데, 시진핑은 그중 셋째가 됩니다. 그러니까 총 3남 4녀 중에서 6번째 자녀인 것입니다.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 사건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파로 몰려서 반당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연히 초등학생이었던 9살짜리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데다가,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각해서 대역죄인으로 찍힌 펑더화이의 부하에다가 반동을 미화한 소설을 펴낸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시 주석은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을 하게 됩니다. 이어 베이징으로 올라와 1975년 칭화대학의 화공과에 입학했습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정권을 잡고, 중앙군사위 주석,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세자리를 모두 장악했지만, 화궈펑은 리더쉽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1979년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실권은 부총리이자 인민정치협상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맙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던 1978년 1962년 이래 16년간 죽 야인으로 지냈던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시 주석은 대학졸업 3년 후인 1982년부터 허난성의 정딩현의 당부서기를 맡는 것을 시작으로 이때부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이후 허베이성을 거쳤다가 199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보이는 남부로 전직합니다. 그리하여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 시 당위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습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부터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부주석 겸 정협의장으로 있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게 됩니다. 더불어 시 주석은 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로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임인 후진타오 주석이 전전임인 장쩌민이 자기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 동안 반쪽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으나, 시진핑은 2013년 중국 공산당 제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 받았고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국가 주석 임기가 끝나면서 국가 주석 직도 승계하였습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3년 3월 14일부터 별 일이 없는 한 2018년 3월 14일의 연임을 거쳐서 2023년 3월 14일까지 중국과 중국 공산당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시진핑이 국가 주석에 오른 이면엔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 암투가 있었다는 것이 국제 정치권의 분석입니다. 장쩌민은 후임인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승계하지 않고 그를 일종의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이 둘은 물밑에서 박터지게 싸웠는데 이런 암투 끝에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 것입니다. 장쩌민 입장에서는 태자당이야 어차피 자기 측근 쩡칭훙이 있으니까, 시진핑 역시 자기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후진타오 입장에서도 공청단 소속이 태자당에도 소속되는 등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인원들이 나름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진핑은 장쩌민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후진타오와 손을 잡고 장쩌민에 대항했고, 이게 현재 반부패를 핑계로 한 상하이방 대규모 숙청의 원인이 됩니다. 원래 장쩌민이 차기 주석으로 삼으려던 인물은 천량위였고 천량위가 실각한 이후 보시라이가 뜨자 보시라이를 주석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 태자당의 선두주자였던 보시라이가 무리수를 범하다가 결국 몰락하며 중국의 최고 지도자 자리는 시진핑이 거머쥐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첫 번째 북미 정상회담까지 결정 (0) | 2018.03.12 |
---|---|
배현진 전 MBC 아나운서 한국당 입당, 6월 송파을 재보선 출마설 (0) | 2018.03.10 |
안희정 충남지사 여비서 성폭행 의혹, 정치인생 최대위기 직면 (0) | 2018.03.06 |
박영선 의원 ‘윤성빈 특혜 응원’ 논란 , 선거위한 인지도 제고 의혹 (0) | 2018.02.18 |
안철수 유승민의 바른미래당 출범, 제3당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0) | 2018.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