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에이스 최민정이 한국시간으로 지난 13일 저녁 여자 500m 결승에 올라 메달 확보를 목전에 두었으나 결국 ‘500m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석연치 않은 심판진의 판정에 2위로 들어오고도 실격 처리되었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은 쇼트트랙 세계 최강국입니다. 1992년 이후 7번의 동계올림픽에서 총 48개의 금메달이 나왔고 그중 21개가 우리대표팀 차지였습니다. 여자 종목에 걸린 24개의 금메달 중 대표팀은 11개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쇼트트랙 강국이지만 유일하게 금메달을 따지 못한 종목이 여자 500m입니다. 1998년 나가노 대회 때 전이경, 2014년 소치 대회 때 박승희가 동메달을 땄을 뿐 은메달도 목에 걸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500m의 벽’은 역시 높았습니다. 최민정은 준결승에서 42초422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결승에 올랐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컸지만 여자 500m는 그 자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최민정은 13일 밤 강릉 아이스아레나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500m 결승에서 1위 아리아나 폰타나에게 겨우 22㎝ 뒤진 2위로 골인했습니다. 사상 첫 은메달이 기대됐지만 마지막 코너를 도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다는 이유로 실격 판정을 받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실격소식을 접한 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 들어선 최민정의 눈가는 이미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경기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것과 비교하면 의외의 모습이었습니다. 앞서 OBS(올림픽 주관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선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정도였지만, 믹스트존에선 "흐흑, 계속 우네요"라며 눈물을 닦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최민정은 씩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최민정은 기자들 앞에서 "경기 전 인터뷰에서 계속 '어떤 결과가 나와도 만족하겠다'고 말했으니 결과에 대한 후회는 없다"라고 운을 뗐습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 힘들었던 것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 같다"라며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셔서 거기에 보답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크다"라고 오히려 자신을 탓했습니다. 이어 최민정은 "아직 세 종목(1000m, 1500m, 3000m 계주)이 남았으니 집중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도록 하겠다"라며 "(오늘 결과가 나머지 세 종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더 잘 준비하겠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심판 판정을 두고는 "제가 잘했다면 부딪힘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라며 승복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이 같은 최민정의 500m 실격 논란에 대한 국제빙상연맹(ISU)은 14일 오전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쇼트트랙 500m 리뷰를 발표했습니다. 이하는 최민정 관련 내용 전문입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쇼트트랙 500m 결선 마지막 코너에서 최민정은 2위를 하고자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 바로 뒤 킴 부탱(캐나다)의 진행라인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최민정의 (2위를 확보하기 위한) 행동으로 야라 판 케르크호프(네덜란드)도 킴 부탱을 앞질러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적인 사건은 최민정이 킴 부탱의 진행을 지연·방해하고 저지한 것에 대한 페널티가 부과되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킴 부탱은 최민정 실격으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쇼트트랙 500m 동메달로 승격했다.)”
쇼트트랙 여자 500m에서 최민정이 실격되면서 동메달을 목에 건 킴 부탱(캐나다)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이 악플로 도배되자 비공개로 전환했습니다. 경기 후 부탱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그를 비난하는 한국 네티즌들의 악플이 줄을 이었습니다. 부탱은 13일 레이스를 마친 뒤 "빙판을 떠나려고 했는데, 엘리스 크리스티(영국)가 내게 '기다려 봐'라고 말했다"면서 "크리스티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돌아봤습니다. 하지만 "나는 레이스 상황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면서 "그래서 나는 그저 '무슨 일이야? 지금 무슨 상황이야?'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부탱에게 기다리라고 언질을 준 크리스티는 최민정과 부탱, 아리안나 폰타나(이탈리아)가 뒤엉켜 있던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크리스티는 "최민정과 부탱이 부딪히는 것을 보고 추월할 기회라고 생각해 치고 올라가려다가 같이 부딪혔다"며 "너무 속도가 빨라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충돌의 여파로 뒤로 밀려난 크리스티는 "밀려났을 때 한 사람만이 실격당할 것이라고 예감했다"며 "그래서 (내 기회는)끝났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날 결승에서 심판들은 위의 ISU 공식 입장에서도 설명되었듯 1바퀴를 남기고 최민정이 부탱을 외곽으로 추월해서 안쪽으로 파고드는 과정에서 왼손으로 부탱의 무릎을 건드린 것이 반칙이라고 보고 실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당초 실격 사유는 최민정이 막판 코너를 돌다 폰타나를 밀치는 장면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습니다. 전이경 SBS 해설위원도 "마지막 코너에서 (최민정이) 손으로 미는 장면이 잡혔는데 은메달을 넘어 우승을 바라보다 다소 무리한 동작이 나온 듯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심판진은 최민정이 부탱에 반칙을 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김선태 대표팀 총감독은 ""공식적으로 최민정이 부탱을 추월하는 과정에서 손으로 무릎을 건드려서 임페딩 반칙을 줬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규정에 임페딩은 '고의로 방해, 가로막기(블로킹), 차징(공격), 또는 몸의 어느 부분으로 다른 선수를 미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만 석연찮은 점은 있습니다. 최민정은 부탱과 경합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반칙을 범했다기보다 서로 주고받은 장면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최민정은 결승 레이스에서 부탱과 3번 정도 접촉이 있었습니다. 스타트에서 2위로 나선 최민정은 초반 인코스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서 부탱과 팔이 다소 영키면서 3위로 처졌습니다. 이후 2바퀴를 남긴 가운데 최민정은 코너를 돌며 아웃코스를 공략하려던 중 부탱의 오른손에 왼팔이 살짝 밀리는 모습이 포착됐습니다. 다시 3위로 처졌던 최민정은 속도를 냈고, 반대편 코너를 돌면서 2위로 올라섰습니다. 이때 빙판을 짚는 최민정의 왼팔이 부탱의 무릎을 막아선 모양새가 됐고, 부탱은 손으로 이를 뿌리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민정은 완전히 2위로 올라서 폰타나와 선두 경쟁까지 벌였고, 부탱은 엘리스 크리스티(영국)와도 충돌해 4위로 처졌습니다.
하지만 심판이 문제 삼은 것은 최민정이 추월 과정에서 왼팔로 부탱의 무릎을 건드린 장면입니다. 다만 임페딩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판단이 내려질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자주 생기도 합니다. 최민정도 "내가 잘했다면 부딪힘이 없지 않았을까 싶다"면서도 "심판들이 보는 카메라와는 조금 각도가 달랐는데 내가 좀 실격 사유가 됐다고 봐서 판정을 내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심판진이 부탱이 미는 동작은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아쉽지만 이에 대한 항의를 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는 "심판에게 항의를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많은데 ISU 규정에는 '심판의 판정은 최종적인 것으로 이에 대한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돼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 감독도 "아쉬운 점은 있지만 분명히 (최민정이) 나가면서 건드린 부분도 있다"며 판정에 수용할 뜻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최선을 다했고 충분히 우승할 자격이 있다"며 최민정을 위로했습니다.
쇼트트랙은 순위가 중요한 만큼 선수들 간의 충돌이 빈번한 종목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로 지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1500m 결승에서 미국의 쇼트트랙 국가대표 안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에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선수가 있습니다. 당시 안톤 오노는 1500m 결선에서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김 선수가 마치 반칙을 한 것처럼 보이는 ‘할리우드 액션’을 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김 선수는 실격처리 됐고 오노가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영상 등을 통해 안톤 오노 선수의 연기가 드러나면서 국내에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은 쇼트트랙 종목에 비디오 판독이 도입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쇼트트랙에서 선수들간의 충돌은 어찌 보면 불가항력적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가장 짧은 거리의 500m는 더합니다. 때문에 쇼트트랙에서는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순위 싸움의 긴박한 재미와 논란의 판정은 쇼트트랙의 피할 수 없는 양날의 검인 것입니다.
이번 논란의 본질에서는 다소 먼 여담입니다만 한마디 사족을 달자면, 위에서 언급한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의 경우 당시 올림픽 주최국이었던 미국선수가 우리의 금메달을 빼앗은 것으로 인식되어 우리 국민들의 울분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이번 최민정 선수의 경우 우리한국이 주최국인 상황에서 벌어졌습니다. 물론 우리가 올림픽 주최국이니 그 이점을 당연히 누려야 한다는게 아닙니다(게다가 이번 올림픽 쇼트트랙 심판진이 이전보다 엄격한 잣대로 경기를 평가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트레이크 올림픽의 오노 외에도 우리는 지난 소치 올림픽에서 주최국 러시아선수에게 우리 김연아 선수가 상대적으로 더 훌륭한 경기를 펼치고도 여자 피겨 금메달을 빼앗긴 전례가 또 있습니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낀다면 너무 오버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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