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 이야기

하춘화, 200억 기부한 '가요계 레전드'

Chris7 2016. 5. 31. 08:25

가요계 레전드라고 타이틀을 붙이긴 했으나 올해 데뷔 55년을 맞이한 가수 하춘화(60)에겐 앞에 붙일 마땅한 수식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그가 남긴 기록 자체가 인생의 수식어라고 할 까요! 그는 여섯 살에 처음 무대에 오른 뒤부터 한 번도 가수란 직업을 놓지 않았습니다. ‘날 버린 남자’ ‘물새 한 마리’ ‘나이야 가라’ 등 수많은 히트곡을 포함해 그의 앨범에 수록된 곡이 2500여개에 이릅니다. 지금까지 개인 공연을 8500회 이상 열었으며 1991년 리사이틀 세계 최다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40여 년간 자신의 공연 수익을 기부해왔습니다. 그 기부금이 무려 200억 원에 달합니다.






하춘화가 공연 수익금을 기부하기 시작한 건 1974년 첫 단독 공연 때부터라고 합니다. 처음엔 부모님의 뜻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 뒤부턴 본인의 의지로 선행을 이어갔습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1974년 공연 수익금은 당시 경기 안양에 있던 나환자촌 ‘나자로 마을’에 기부했어요. 그 후 제게 기념이 될 만한 공연 때마다 수익금을 모두 기부해왔습니다. 단체에 기부할 때도 있고, 직접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할 때도 있었죠. 제 공연은 무대의 막이 내려질 때가 아니라 공연 수익금이 기부될 때 비로소 마무리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기부할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엔 “공연할 때 버는 돈을 애초에 내 돈이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대중이 직접 공연장에 찾아와 제 무대를 함께 즐기며 주고 가신 돈입니다. 그게 어떻게 제 돈입니까. 그러니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돈은 좋은 일,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써야죠. 기부는 꼭 재산이 많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아요. 제 것을 아끼고 쪼개서 하는 거죠.”


하춘화는 지난 3월 9일부터 19일까지 아프리카 남부 잠비아로 봉사활동을 다녀왔습니다. 그는 “한국의 가수로서 봉사 정신을 실천할 기회를 얻어 매우 기쁘다”며 “가수 생활이 끝날 때까지 나눔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스타의 자리를 지켜온 비결은 무엇일까요? 하춘화는 “매일의 실천이 조금씩 쌓인 것이라고 본다”며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 가수의 생명은 끝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몸 관리를 어떻게 하냐고 많이 물어요. 그런데 가수는 출퇴근 시간이 없는 자유직이잖아요.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없죠. 30분이든 1시간이든 그날그날 때에 맞춰 닥치는 대로 운동합니다. 매년 건강검진도 하고요. 밥 세 끼 잘 챙겨먹는 건 기본이지만, 공연 전엔 먹지 않습니다. 배가 너무 부르면 오히려 힘을 못 쓰는 스타일이거든요. 평소 닦은 기초체력으로 공연하는 거죠.”


그는 가요계에서 ‘지독한 연습 벌레’로 유명합니다. 스스로도 “작곡가 선생님들이 ‘대한민국에서 연습 가장 많이 하는 가수는 하춘화’라고 하신다”고 할 정도입니다. “남들보다 철이 좀 일찍 들었어요. 열일곱 살 때쯤 철들기 시작한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대중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대접을 받으면서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녹음할 때 ‘이 정도면 됐다’ 해도 녹음을 더 하자고 계속 청했습니다. 지금도 하루 2~3시간, 아무리 바빠도 최소 1시간은 연습합니다.”


하춘화가 생각하는 ‘좋은 노래’란 무엇일까요? “노래에 대한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제가 젊었을 땐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라면 뭐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가수가 아니라 작품을 좋아합니다. 요즘엔 노랫말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이 멜로디, 그다음이 편곡이라고 봅니다. ‘좋은 노래’의 기준은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대중이 정하는 거예요. 제 의지와는 상관없죠.” 이와 더불어 “시대를 넘어 사랑받는 노래는 가수 본인의 노력이 뒷받침된 것”이라며 “대중의 눈은 매우 밝기 때문에 결코 아무에게나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대중은 아마추어의 실수는 용서해도 프로의 실수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프로이기 때문에 연습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곧바로 티가 나요. 가수가 어쩌다가 유명해질 수는 있지만 그 인기를 지키려면 본인의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죠.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실제로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트로트 가수 대신 전통가요 가수라 불리길 원합니다. “‘트로트’ 하면 우리의 가요란 느낌이 살지 않잖아요. 전 우리 전통가요가 마치 김치처럼, 우리네 부모님처럼 늘 평소에 품고 지내는 본능적 원형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땐 다양한 분야의 노래를 좋아하다가 중년 이후가 되면 전통가요가 자연히 좋아지잖아요.”


하춘화는 인터뷰에서 연예인으로서 늘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 고충도 털어놨습니다. “공연 전엔 무인도에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습니다. 1년 365일 공인으로 사는 게 왜 피곤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이게 제 천직인 걸요. 견디며 살아야죠.” 그래서일까요?! 그의 인생 좌우명은 ‘삶은 곧 인내’라고 합니다. 그는 “먹고 싶은 것 덜 먹고, 자고 싶은 것 덜 자고, 놀고 싶은 마음 누르며 일하는 것 등 인생 과정 모든 게 인내의 연속”이라며 “항상 긴장하며 스스로 절제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방송 활동도 좋지만 콘서트에서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것을 훨씬 좋아합니다. 콘서트를 준비할 땐 무대 장치와 디자인, 조명 등 세밀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깁니다. “제 이름을 걸고 하는 공연이니까요. 흠이 나면 안 되죠. 노래는 음원 파일이나 CD를 통해 들을 수 있고, 방송에선 가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가수와 관객이 서로 진정으로 소통하는 자리는 단연 콘서트입니다. 그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최고의 공연을 위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항상 자신과 주위를 냉철히 살핍니다. “처음 데뷔했을 때나 55년이 지난 지금이나 공연 전의 마음가짐은 똑같습니다. ‘언제나 신인’이란 생각으로, 늘 가슴이 두근거리는 설렘을 안고 공연을 준비하죠. 다른 사람들이 제게 하는 칭찬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왜냐하면 주변에선 제게 좋은 말만 하거든요. 자신의 단점은 스스로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어요. 전 자신에게 매우 냉정한 사람입니다.”






사실 40대 이하 젊은 층에겐 하춘화란 가수가 낯익은 이는 아닙니다. 아마 50대는 넘어야 어느정도 그의 노래를 기억할 것입니다. 젊은 층에겐 어쩜 개그맨 김영철의 코믹한 모창으로 더 알려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우리 가요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데뷔나이가 6살이란 것부터가 비범합니다. 2500여곡의 정규앨범 수록곡에다 최다 리사이틀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으며 200억 원이란 기부금 액수 또한 남다릅니다.


말이 쉬워 200억이지 이 금액은 저 같은 보통사람은 쉽게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금액입니다. 게다가 1.2년도 아닌 40여년이란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기부를 해왔다는 점이 또한 놀라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부를 공개하는게 쑥스럽고 어색했다는 하춘화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기부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부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공개를 결정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은 그는 항상 주위를 둘러보며 어렵고 소외된 이웃에게 베푸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과거 코미디언 고 이주일 생존시 그와 하춘화간의 인연이 때때로 화제가 되기도 했었는데요... 아주 예전 ‘이리역 폭파사고’ 당시 무명이었던 고 이주일이 자신의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하춘화를 들쳐 업고 사고지역에서 뛰어나온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이어져온 두 사람사이의 의리까지... 레전드라는 말이 연예계에서 흔하게 사용되곤 있으나 가수 하춘화에게 만큼은 결코 과한 수식어가 아닐 것입니다. 가요계 레전드로서 그리고 기부천사로서 그의 활동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쭉 이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