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발생한 소위 ‘강남역 묻지마 살인’의 현장검증이 24일 오전 9시부터 약 30분간 사건이 발생한 서초구의 한 상가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진행됐습니다. 피의자 김모 씨(34)는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하루전날인 23일엔 피해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 공간이 철거됐습니다. 비가 오면 메시지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시민들이 메모를 보존하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스티로폼 판에 옮겨 붙인 메모지는 1.5t 트럭 한 대 분량에 달했다고 합니다. 서울시는 이를 시민청과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등으로 옮겨 영구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8일 트위터 글에서 시작된 추모 움직임은 이후 전국으로 확대됐습니다. 그 중심이 된 강남역 10번 출구엔 5일간 수천 명의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공간은 철거됐지만 ‘여성 혐오’ 논쟁은 식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이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닌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의 범행이라고 밝혔지만 “사건 원인을 떠나 여성 혐오를 뿌리 뽑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습니다.
22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언론과 인터뷰한 20대 여성은 “여성 혐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여성이 폭력에 노출돼 있고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대규모 추모 공간이 된 이곳에 모인 20·30대 여성들은 경찰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 ‘조현병’ 환자에 의한 개인 범행이라고 발표한 데 대해 “어떻게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있느냐”며 항변했습니다. 이곳뿐이 아닙니다. 부산 서면 젊음의 거리, 대구 중앙로역, 대전 시청역 등에서도 ‘나는 오늘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언제까지 여자가 조심해야 하는가’ 등의 메모지 수천 장이 나붙었습니다.
특히 경찰 조사 결과 살인 피의자 김씨가 화장실에서 마주친 남성 6명을 모두 보내고 여성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여론이 촉발됐습니다. 이 때문에 트위터에서 ‘강남역 살인사건 공론화(@0517am1)’라는 이름의 계정이 개설돼 이번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김규원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런 현상에 대해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위기감과 함께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이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사회는 개인주의화됐으나 이런 가운데 유대감(공감)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번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나타난 여성의 집단적인 의사 표출은 과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수많은 여성이 희생된 유영철 사건도 여성 혐오의 발현이지만 이번처럼 큰 반향은 없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 딸이나 내 동생도 당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남성도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남역 추모 공간에 나온 20대 남성도 “경찰의 발표는 단지 법 집행을 위한 분석일 뿐”이라며 “젠더(gender·성)의 문제, 사회적 문제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여성으로서 평소 겪은 공포감과 불안의식이 왜 이번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을까요? 이에 대해 “여성 혐오 문제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입습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단순히 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엄청난 파급력을 보인다. 우리 사회에 ‘여성 혐오’가 만연해 있고 여성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남역 사건은 그 ‘결과’이거나 문제를 더욱 증폭시킨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여성 대다수는 ‘여성 혐오’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월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83%가 인터넷·SNS에서 ‘김치녀’(한국 여성을 비하적으로 일컫는 말), ‘성괴’(성형한 여성), ‘삼일한’(여성은 3일에 한 번 때려야 한다) 등의 여성 혐오 표현을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여성 절반 이상(58.3%)은 앞으로 여성 혐오가 더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했고, 혐오가 약화될 것이란 응답은 8.7%에 불과했습니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권익·안전연구실장은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된 여성 혐오의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여성 혐오에 대한 반감 표출은 온·오프라인에서 또 다른 반발을 몰고 오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강남역 추모 현장에는 핑크색 코끼리 인형 옷을 입은 사람이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것”이라는 문구가 적힌 화이트보드를 들고 등장했습니다. 피해 여성을 추모하던 시민들은 “의상과 문구가 적절치 않다”고 항의했습니다. 이어 코끼리 옷을 입은 사람을 두고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앞서 19일 일베 회원들은 강남역 현장에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화환을 보내 논란이 일었습니다. “한 범죄자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온 남성을 모욕하지 말라”는 주장이 SNS에서 퍼지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번 사건이 성 대결의 구도로 번지는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차별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문제이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수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남녀 간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온·오프라인에서 비합리적인 혐오와 차별을 없애는 계기로 삼자”고 했습니다.
글로벌적으로 만성화되어가는 저성장 기조 속에 우리사회는 청년 실업률이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젠 경제적 여유 없인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극히 일부에 한정되긴 하지만, 남성들의 이유 없는 상대적 박탈감에 기인한 ‘여성 혐오증’이 갈수록 심해지고 이번과 같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는 근본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물론 이번 사건의 피의자 김모씨가 꼭 이런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건 아닙니다만... 문제는 이런 상황이 앞으로 더 심화되어 갈 것이란 우려감이 든다는데 있습니다. 돈 없으면 결혼도, 연애도 못하는 세상에서 남녀 구분 없이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제1순위가 경제력이라면 못가진이들의 박탈감과 이에 기인한 불만이 어디로 향할까요? 정부와 사회를 향한 시위 같은 방향이 될 수도 있으나 이번 ‘강남역 살인’같은 혐오범죄로 변질될 가능성 또한 농후한 것입니다.
‘강남역 살인’과 다소 성격이 다르긴 하나 일본에서도 최근 스토커에 의한 ‘아이돌 피습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도미타 마유라는 20세의 가수 겸 배우가 상당기간 그를 스토커해온 이와자키라는 용의자에 의해 20여 곳 이상 칼에 찔려 중태에 빠진 것입니다. 이와 연계되어 ‘잃어버린 20년’이란 말로 정의되는 장기경제 침체 속에서 일본사회는 20여 년간 방안에만 틀어박혀 생활하는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사회에 대한 적개심과 외톨이중 상대적 비율이 높은 남성들이 막연하게 여성에 대해 품은 이유 없는 반감이 언제라도 ‘아이돌 피습사건’과 한국의 ‘강남역 살인’같은 극단적 형태로 표출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도 이 문제를 단순히 강 건너 불구경 할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조현병’환자에 의한 단순 범죄다, 아니다 ‘여성 혐오 범죄다’라는 등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으며 일부에선 성대결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에 ‘여성혐오’현상이 존재하며 이에 기인한 ‘묻지마 범죄’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성 혐오 범죄’에는 실업이나 빈곤 등 경제적 문제 외에도 사회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남성위주’ 혹은 ‘가부장적’ 기조도 분명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우리사회는, 아닌 글로벌 사회 전체가 지금 안고 있습니다. 단순히 한 개인이, 한 단체가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심정이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이 현재와 같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것은 여성들의 ‘나도 언제 어디서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현실적 공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많은 이들이 이번 사건을 보며 분노하고 우려하고 있는 가 봅니다. 현재와 같은 사회적 반향은 꼭 이번사건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폭발할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막연하게 가져온 불만이나 불안감이 ‘강남역 살인’사건을 매개체로 폭발했을 뿐입니다. 현 시점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혐범죄다 아니다 의 갑론을박이나 남녀의 성대결 보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사회의 건전성을 위해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런 말이 그저 공허한 메아리이긴 하나 현실적으로 이정도 말밖에 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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