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 이야기

‘응답하라 1988’의 아쉬운 결말, 과도한 남편 찾기

Chris7 2016. 1. 18. 10:20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종영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은 쌍팔년도 쌍문동, 한 골목 다섯 가족의 왁자지껄 이야기를 그린 코믹 가족극입니다. 드라마는 16일 성선우(고경표)-성보라(류해영) 커플, 최택(박보검)-성덕선(혜리) 커플이 결혼에 골인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됐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매번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번 3탄은 가히 레전드급 인기였습니다. 방송이 끝날 때마다 '누가 덕선(혜리) 남편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시청률도 수직상승했습니다.

 


 

 

특히 마지막화는 평균 시청률 19.6%(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 순간 최고 시청률 21.6%를 기록하며 역대 케이블 방송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는데도 성공했습니다. 공중파 드라마가 10%만 넘어도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 평가받는 요즘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보다 놀라운 것은 확연히 세대별 시청 프로그램이 갈리는 TV콘텐츠에서, 10대에서 50대까지 거의 전 세대를 아우르며 '인기'를 구가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성과를 거둔 가장 큰 요인은 4·50대 세대의 '추억'과, 시대적 특수성에도 변치않는 '사랑'이라는 두 화두를 적절하게 버무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덕분에 엄마와 딸이 휴지로 흐르는 눈물을 닦고, 덕선(혜리 분)의 남편감을 두고 격의 없는 설전을 벌이는 세대 간 화해를 이루는 성취를 보였습니다. 이렇듯 수치상으로도, 이슈면에서도 두말할 필요 없는 대성공입니다. 그러나 어쩐지 지난 시리즈와는 다르게 이번 '응답하라 1988'에는 결말에 대한 진한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입니다. 과도한 '남편 찾기'로 극의 전체적 흐름을 힘 있게 이어가지 못한 듯 해서입니다.

 

 

극은 중반에 들어서며 드러난 서사의 빈 공간을 가족 에피소드와 남편 찾기의 떡밥으로 채워갔는데, 사실 이것은 ‘응답하라 1994’와 ‘응답하라 1997에서도 적용된 일종의 강력한 클리셰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제작진은 극 초반, 전작을 독파한 시청자들이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라고 지레 결론 내리는 불상사에 대처하고자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상이한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택은 ‘어남류’임을 믿었던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심지어 ‘응답하라’시리즈가 가진 고유성마저 흔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정환 캐릭터가 실종됐다는 점입니다. 초반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력한 남편 후보였던 그는 또 다른 남편 후보였던 최택도 아닌 보라-선우 커플의 로맨스에 밀려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시청자들이 찝찝함을 느끼는 것도 이 대목입니다. 제작진은 미래 덕선의 남편 김주혁을 통해 꽤 많은 떡밥을 투척했습니다. 미래의 덕선이 수학여행을 추억하는 장면에서 "나도 거기 있었잖아"라고 말해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던 택은 남편 후보에서 제외되기도 했었습니다. 덕선의 첫 사랑이 선우라는 것, 그리고 선우가 덕선이 아닌 보라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대성통곡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정환이었습니다. 이런 떡밥들이 난무한 가운데 너무나 어이없이 정환 캐릭터는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가 첫사랑을 포기하는 과정도, 마음 정리하는 모습도,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덕선 남편이 류준열 아닌 최택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주요 인물이 어느 순간 갑자기 병풍으로 전락하며 설득력이 떨어졌다는 것이 문제란 얘기입니다. 극 초반부터 등장했던 '어남류'라는 말은 그저 '남편 찾기'에 대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간 ‘응답하라’ 시리즈가 담아온 정서와 주제를 파악해 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입니다.

 

 

‘응답하라’ 시리즈의 남자 주인공들은 그 시대에 살았을 평범한 녀석들입니다. 비록 ‘응답하라 1994’의 쓰레기(정우 분)나, ‘응답하라 1997’의 윤제(서인국 분)가 대한민국 상위 계층에 해당하는 의사가 되었다지만 말 그대로 싸가지 없거나 때론 쓰레기 같았을 인물들입니다. 그에 비해 그들의 연적이었던 ‘응사’의 칠봉이(유연석 분)나 윤태웅(송종호 분)은 당대의 영웅(?)이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의 최택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한껏 여주인공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다가 어느 순간 드라마에서 사라지곤 했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잔인한 이별을 고해도 그들에게는 당대의 영웅으로 거듭날 그들만의 서사가 남아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들에게 몰입했던 시청자들은 그래서 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이들은 사랑으로 가정을 꾸리고, 잠시 그녀를 사랑했던 영웅은 그들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런데 ‘응팔’은 전작부터 내려온 그 흐름과 인물들의 당대성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가 최택이라는 당대의 영웅 같은, 심지어 잘 생기기까지 한 인물에 의해 깨진 것입니다. 동시에 보통 소년이었던 정환은 공중으로 뜨게 만들었습니다. 1988년 청춘의 당대성이 소실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주인공인 덕선이가 사랑을 찾았으니까 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작진의 속임수였는지 모르지만 드라마는 16부에 이르기까지 정환의 사랑 이야기에 치중했습니다. 카메라는 대부분 정환을 향해 있었고, 택이와 덕선의 이야기는 외곽의 일화처럼 다루어 졌습니다. 그러니 시청자들 역시 제작진이 짜놓은 프레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시청자들은 정환의 순애보 전사를 덕선보다도 잘 압니다. 거기다 정환은 가족애의 현현입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무뚝뚝하지만 라미란 여사네 아들로서 속 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디 가족뿐인가요? 선우(고경표 분)를 괴롭히는 친구들을 혼내주는 의리파기도 했습니다. 이전의 작품들은 공동체를 위해 종종 자신마저 희생하는 남자 주인공에게 그 보상으로 사랑을 선사했는데 이번엔 고백 타이밍조차 맞추지 못해 거짓말 하게 만드는 바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정환 만큼 평범했던 동룡(이동휘 분)마저 실종됐습니다. 어떤 시리즈보다 가장 혈육 같았던 친구들이 덕선과 택이의 사랑 메신저로만 소비된 셈입니다.

 

 

충성스런 시청자들 입장에선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응답하라 1988’의 변경된 전략을 받아든 시청자들은 이것 또한 남편 찾기의 재미로 해석할지, 아니면 덕선에 대한 택의 순애보로 받아들일지, 그도 아니면 궤도 이탈해 버린 실패작으로 볼 지 스스로 해석하게 될 운명에 놓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