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친박계 내부에서 시작된 헌법 개정 논의가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반기문 외교 대통령-친박 총리'의 ‘이원집정부제’라는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언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년 총선을 전후해 개헌 문제가 정치적 태풍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원집정부제’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해 10월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가 청와대로부터 된서리를 맞고 하루 만에 사과했던 그 제도 입니다. 당시 박 대통령은 “개헌논의가 국가 역량을 분산할 경우 경제 블랙홀을 유발할 수 있다”며 개헌논의에 족쇄를 채운 상태였습니다. 이후 여권에서 ‘개헌’이라는 단어는 ‘금기어’로 봉인된 상태 입니다.
이런 마당에서의 개헌 언급은 생뚱맞은 발상 또는 일방적 주장으로 폄하되기 십상입니다. ‘이원집정부제’ 개헌 주장은 자칫 잘못 얘기했다가는 당장 ‘파문’될 수도 있는 중대한 일탈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 주변 인사들조차 사석에서 개헌문제를 입에 올리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염두에 둔 ‘이원집정부제’를 유력한 대안 권력구조로 민다는 말까지 들립니다.
발단은 친박계 핵심인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입니다. 최 경제부총리는 지난 4일 한 행사장에서 "최근 20년 이상이 5년 단임 정부다. 그러다 보니 정책 일관성·지속성을 유지하기 매우 어렵다"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정책의 일관성·지속성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고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이후 5일에는 역시 친박계 핵심인 홍문종 의원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이제 수명을 다한 것 아니냐"며 "정치가 일관성을 가질 수 있고 극한 대립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원집정부제를 찬성한다"고 이야기 한 뒤 12일에는 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저희 생각에는 이원집정부제, 외치를 하는 대통령과 내치를 하는 총리, 이렇게 하는 것이 현재 5년 단임제 대통령제보다는 훨씬 더 정책의 일관성도 있고 또 국민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할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고 그것들이 좀 탄력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조금 더 구체적인 개헌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당 지도부에서는 이인제 최고위원이 농어촌 지역 대표성을 담보하기 위한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힘을 보탰습니다.
정가에서는 친박계에서 시작된 개헌 논의가 반기문 외치 담당 대통령과 친박계 총리로 이어지는 '이원집정부제' 구상 시나리오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전한 정치적 영향력과 대중 호소력을 지닌 박근혜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당 비상대책위원을 지낸 이상돈 교수는 지난 9월 "시중에 들리는 말대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외교 대통령으로 하고 그렇게 되면 친박에서 이원집정부제의 총리감은 있다, 이런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시나리오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총리-대통령 권력분점 구도에선 지역 간 연대의 틀도 마련될 수 있습니다. 즉 앞서 이야기 되었듯이 충청 출신 대통령과 TK 출신 총리론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면 ‘반기문 대통령+최경환 국무총리’ 조합이 가능한 것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총리는 국회 다수당의 수장이 차지하는 식입니다. 지난해 청와대가 김 대표의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에 제동을 건 것도 이의 연장선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김 대표가 개헌이라는 거대 담론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걸 청와대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일 뿐 개헌 자체를 완전 배제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입니다.
야당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제와 단임제의 폐해를 들어 개헌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이가 많습니다. 야권도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시각이 확산될수록 권력을 나누는 개헌에 눈길을 주기 마련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론’에서 벗어나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길을 이원집정부제에서 찾자는 의견이 고개를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야당 내 대표적 개헌론자인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시중에 나도는 '시나리오'처럼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원칙적으로 권력분화형 개헌에 동의한다. 여당이 주도한다고 해도 동의할 것"이라고 긍정적 견해를 밝혔습니다. 새누리당이 내년 총선에서 과반을 얻고 야당 내 '개헌파'의 동의를 구하면 논의는 급물살을 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차기 주자라고 해서 반드시 현행 대통령제에 집착하는 건 아닙니다. 당장 새누리당의 유력한 차기 주자인 김무성 대표부터가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자 입니다. 10월 6일 광복 70주년 관련 세미나에서 김무성 대표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은 정치적으로 1987년 체제를, 경제적으로 1997년 체제를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며 불을 또 지폈습니다. 87년 체제란 5년 단임제를 근간으로 하는 현행 헌법체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차기 주자들이 분권형 개헌을 꼭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말합니다. “현행 대통령제 하에서 당선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주자는 분권형 개헌 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다. 또 여야는 공히 권력 참여를 갈망한다. 권력을 나누는 개헌에 기본적으로 인식을 공유한다.” 그래서 내년 총선 이후 개헌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게 박 교수의 전망입니다.
현 시점에서 개헌논의를 막는 쪽은 박 대통령과 친박계 등 집권 세력입니다. 총선 이후 친박계가 생각을 달리 한다면 개헌론은 급물살을 타게 되는 구조인 것입니다. 물론 개헌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아직은 이런저런 시나리오들이 그저 설로만 회자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은 ‘4년 중임제’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터라 운신의 폭이 크지 않은 상황입니다. 또한 박 대통령은 여전히 개헌 논의에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민생과 경제활성화, 개혁 법안 처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는 마당에 개헌론이 불거질 경우 국정 운영에 장애가 발생할 수 있는 탓입니다. 사실상의 장기 집권을 위한 ‘꼼수’라는 괜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권 일각에선 개헌론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는 관측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총선 이후 대선 정국이 본격화하면서 친박계가 다시 개헌론을 제기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기에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권 내 ‘개헌논의 금지’라는 봉인이 풀리는 날 정치권에 일대 격변이 올 수도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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