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

강성좌파 코빈의 영국 노동당 당수 선출과 중도주의의 쇠퇴

Chris7 2015. 9. 24. 10:15

지난 12일 영국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강성 좌파인 제러미 코빈(66)이 1차 투표에서 59.5%를 득표해 당수로 선출됐습니다. 42만2664표 중 25만1417표를 얻었습니다. 압도적 승리인 1994년 토니 블레어의 당선 득표율(57%)을 웃돈 성적입니다. 영국 노동당의 좌회전은 일찍히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토록 급격한 좌회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당수(AFP=연합뉴스)

 

 

경선 중반 이후 코빈의 당선은 기정사실화 됐엇습니다. 반긴축과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와 함께 이라크 전쟁에도 반대한, 기성 정치인과 차별화되는 진정성이 돋보이면서 부터입니다. 노동당을 떠났던 좌파와 노조주의자들 사이에 열풍이 불었습니다. 막판에 투표하겠다고 16만 명이 몰렸는데 대부분 코빈 지지자란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60%까지 득표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3파운드(약 5500원)를 내고 투표에 참여한 지지자들뿐 아니라 전통적인 당원들에서도 코빈이 앞섰습니다. 2위 득표율은 19%에 불과했고, 영국 언론들은 “논쟁의 여지 없는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사실 코빈이 경선에 뛰어든 6월 초만 해도 이를 예견한 이는 없었습니다. 후보 등록을 위해 의원 35명의 서명이 필요했는데 선거 막판에야 겨우 채울 정도였습니다. 일부 의원은 코빈을 지지하지 않는데도 “왼쪽의 목소리도 있어야 한다”며 선심 차원에서도 서명해줬습니다. 당시 도박업체들은 4명의 후보 중 코빈의 당선 가능성을 200대 1로 봤다고 합니다.

 

 

코빈은 노동당 내 철저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1983년 런던 북부에서 당선된 후 32년 동안 내각은 물론 예비 내각에도 참여해본 일 없는 평의원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처합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노동당 의원 232명 중 가장 왼쪽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의원”이라고 평가합니다. 긴축에 반대할 뿐 아니라 철도·전기·가스 국유화를 주장합니다. 영국의 무료 의료서비스(NHS)처럼 교육도 그렇게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외교안보에선 더 왼쪽입니다. 핵개발운용체제인 트라이던트 현대화에 반대합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잔류에 반대하지 않으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선 탈퇴해야 한다는 쪽입니다. 또한 영국이 북아일랜드에서 발을 빼 아일랜드가 통일돼야 한다는 입장도 가지고 입습니다. 당장 보수당 소속인 마이클 팰런 국방장관이 “안보에 심대한 위협”이라고 공격했을 정도입니다.

 

 

83년 마이클 풋 노동당수가 좌클릭 플랫폼으로 총선을 치렀다가 마거릿 대처 전 총리에게 대패한 이후 노동당은 중도로 옮아갔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토니 블레어였습니다. 고든 브라운을 거쳐 전임 당수인 에드 밀리밴드 때에야 비로소 다시 왼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밀리밴드 당수는 그러나 지난 5월 총선에서 참패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좌편향 정책도 요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동료 의원들이 코빈의 당선에 불안해하는 이유입니다. 선거후 예비내각에 있던 의원 10여 명이 코빈과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외교장관을 지낸 잭 스트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고 했습니다.

 

 

지지자의 열광 못지않게 의원들의 불안·냉소도 큰 상태란 얘기입니다. 이런 괴리가 노동당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내년 5월 지방선거를 계기로 노동당 내 내전이 벌어질 것이란 분석이 우세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500차례 이상 당론에 배치되는 투표를 했던 코빈으로선 의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가 아닙니다.

 

 

외신들은 이런 흐름을 좌파 진영에서 부는 세계적 반긴축 움직임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스에서 급진 좌파 시리자가 집권했고 스페인에서 포데모스가 당선 가능성을 높여가는 연장선상이란 얘기입니다. 무소속이나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도 그중 하나입니다.

 

 

반긴축·반민영화를 강조해 온 정통 사회주의자 코빈 신임 당수의 부상으로 같은 당 출신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주창, 20세기 말∼21세기 초를 풍미했던 중도주의 ‘제3의 길’은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드는 모양새입니다.

 

 

코빈 의원은 노동당의 승리를 위해 전통적 좌파 공약을 과감히 버리고 중도세력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블레어 전 총리의 ‘신노동당’ 노선에 반대한 ‘사회주의 캠페인 그룹’의 일원이었습니다. 전국공무원노조(NUPE) 출신으로 33년간 하원 의원을 지내며 500여 차례나 당론과 맞서는 투표를 행사할 정도로 반(反)기득권이라는 좌파 가치 사수에 천착했습니다. 선거 기간 내내 그는 보수당 정부의 재정 긴축을 강력히 거부할 것을 공약하면서 재정적자 축소의 해법으로 기업과 부유층의 탈세 방지를 내세웠습니다. 또 철도, 에너지 등 국가기간산업의 국유화에 대한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해 왔습니다.

 

 

코빈 의원의 약진이 대서양 건너에서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 미국 대선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샌더스, 코빈, 민주당에 다가올 논란’이라는 기사를 통해 버니 샌더스(74·버몬트) 상원의원이 민주당 경선 초반 일으키고 있는 돌풍이 코빈을 선택한 영국 노동당 지지층의 반기득권 정서와 밀접히 맞닿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수년간 압도적 차기 주자로 인식되던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과의 격차를 줄여나가고 있는 샌더스 의원의 약진에는 중도주의에 대한 실망과 강성 좌파에 대한 진보진영의 갈증이 깔려있다는 지적입니다.

 

 

힐러리 전 장관과 그의 배우자인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블레어 전 총리와 함께 중도주의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들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2000년대 초반 글로벌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 의제로 부상한 부의 불평등,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중도 진보에 대한 환멸이 유권자의 시선을 보다 강경한 사회주의적 처방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빈이나 샌더스와는 이념적 대척점에 있지만 미 공화당 경선에서 극우 세력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대선주자 도널드 트럼프(69)의 인기 또한 ‘중도주의의 위기’라는 시대상으로 귀결된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