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제2의 철의 여인’이 탄생했습니다. 리즈 트러스(47) 외무장관이 영국의 새 총리로 선출된 것입니다. 트러스 총리는 '원조 철의 여인'인 마거릿 대처(재임기간 1979~1990) 전 총리의 후계를 자임하는 강경 보수 정치인입니다. 영국 역대 세 번째 여성 총리이기도 합니다. 5일(현지시간) 영국 집권 보수당은 당원 약 16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당대표 투표에서 트러스 총리 내정자가 57.4%(8만1,326표)의 지지율을 얻어 승리했다고 밝혔습니다.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에선 집권당 대표가 총리직을 자동 승계하는 만큼, 그는 불명예 퇴진하는 보리스 존슨 총리의 뒤를 이어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도 차지하게 됐습니다.
경선 과정에선 인도계 리시 수낙(42) 전 재무장관(득표율 42.6%·6만399표)이 줄곧 1위를 지켰지만, 고연령·고소득 백인 보수당원들의 표심은 막판에 백인인 트러스 총리에게 쏠렸습니다. 트러스 총리 내정자는 당선 발표 직후 “세금을 줄이고 경제 성장을 위한 과감한 계획을 실행하겠다”며 “에너지 요금뿐만 아니라 공급에 관한 장기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공식 취임은 6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알현 직후가 됩니다. 보수당은 7월 존슨 총리가 파티게이트와 측근 성폭력 비호 논란으로 자진 사퇴를 선언한 후 후임 총리 선출 작업을 벌여왔습니다.
트러스 총리 내정자는 대처와 테리사 메이(2016~2019) 전 총리에 이은 영국의 역대 세 번째 여성 최고지도자입니다. 그는 경선 기간 내내 대처 전 총리를 연상시키는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와 친시장주의 정책을 부르짖은 것은 물론, 의상, 말투, 포즈까지 모조리 따라해 “철의 여인 스타일을 훔쳐 정치적 입지를 넓힌다"(일간 텔레그래프)는 비판적 평가도 받았습니다.
원래 트러스는 ‘반(反)대처’ 입장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노동당 지지자가 많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수학교수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는 대처 반대 시위에 나가는 강경한 좌파였습니다. 그도 어린 시절 학교의 모의 총선에서 대처 역할을 맡았을 때, 스스로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옥스퍼드대 재학 중엔 중도 좌파인 자유민주당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1996년 만 21세에 열렬한 보수 당원으로 전향하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정치적 전향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2016년엔 유럽연합(EU) 잔류를 지지했지만, 이후 브렉시트 찬성으로 돌아섰습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일각에선 그를 출세를 향해 움직이는 ‘풍향계’라고 비판한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역으로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승리를 위해 기존의 입장도 바꾸는 실용적인 모습이 여성 정치인으로 보기 드물게 야심차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BBC는 트러스 신임 총리 가족 인터뷰를 통해 "그는 보드게임조차도 이겨야 하는 사람"이라면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길을 찾는다"고 묘사했습니다. 대학 시절 그와 함께 자유민주당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트러스는 어떤 입장을 가진 사람이든 그앞에서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옥스퍼드대 머튼칼리지에서 철학·정치·경제(PPE)를 전공하고 2000년까지 셸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정치 입문 후 두 차례 낙선을 거쳐 2006년 런던 그리니치 지역 구의원(Councillor)에 당선됐고 4년 뒤 런던에서 동북쪽으로 2시간 정도 떨어진 노퍽 지역을 지역구로 하원에 처음 입성했습니다. 당시 35세였습니다. 이후 2012년부터 데이비드 캐머런 내각과 메이 내각에 등용돼 두루 경험을 쌓았습니다.
지난 2000년 회계사와 결혼한 그는 2006년 마크 필드 전 보수당 의원과 18개월간 만났던 불륜이 공개되면서 한때 정치 생명에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필드 전 의원은 이로 인해 12년간의 결혼생활이 파탄났지만 트러스는 이를 이겨내고 가정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2019년 한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불륜에 대한 물음을 받았을 땐 "결혼해서 정말 행복하다"고 받아치기도 했습니다. 더타임스는 "최근 그의 불륜은 더는 언급되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평판에 묻은 어떤 얼룩도 지워내는 능숙한 정치인"이라고 했습니다.
‘트러스 시대’ 막은 올랐지만 앞날은 가시밭길입니다. 40년 만에 최악의 물가 상승(인플레이션)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불러온 에너지 위기에 직면한 나라를 이끄는 막중한 과제를 떠안게 됐기 때문입니다. 허니문을 즐길 새도 없이 치솟은 물가와 에너지 요금 급등에 따른 생계비 문제 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으로 10월부터 영국 가계의 에너지 요금은 80%가량 뛸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번 겨울 누군가는 ‘난방이냐 빵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7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0%대로 급등한 데 이어 "내년에는 22%까지 치솟을 것"(골드만삭스)이라는 예측마저 나왔습니다.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이 “올해 4분기부터 내년 말까지 긴 경기 침체를 겪을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로 영국 경제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2분기에는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식민지였던 인도에 추월당하는 굴욕도 겪었습니다. 통화 가치도 고꾸라지고 있습니다.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는 올해 들어 15% 하락했습니다. 세계 외환시장을 강타한 ‘강달러’에 영국의 경제 상황이 더해진 결과입니다. 파운드화 약세가 지속되면 수입 물가가 더 뛰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하는 악순환이 불가피합니다.
트러스 총리 내정자의 경제 구상, 이른바 ‘트러소노믹스’가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 거라는 불신도 뜨거운 상황입니다. 그는 “경제 불평등보다 성장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펼치겠다”며 △법인세율 인상 철회 △환경부담금 면제 등 강도 높은 감세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전체 감세 규모는 300억 파운드(약 47조7,000억 원)에 달합니다. 이 같은 감세 정책은 경기 부양에 효과적이지만, 물가 상승세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기도 합니다.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공공ㆍ필수 부문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같은 당 중진 데이비드 데이비스 의원은 “1979년 대처 총리에 이어 전후 총리 중 두 번째로 어려운 시기를 겪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외교면에서 트러스 총리 내정자는 중국에 대한 강경 기조를 이어갈 전망입니다. 그는 외교·군사 분야의 ‘매파’를 자처해왔기 때문입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트러스는 중국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영국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분류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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