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차기 국무총리 후보에 정세균(69) 전 국회의장을 지명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 30분 청와대 기자실이 있는 춘추관 2층 브리핑룸에서 직접 정 전 의장에 대한 지명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정 전 의장 지명은 헌정사상 첫 국회의장 출신 총리 발탁입니다. 정 전 의장이 국회 인준을 통과하면 이낙연 총리에 이어 또다시 호남 출신 총리가 됩니다. 특히 문 대통령은 현 정부 초대 이낙연 국무총리에 이어 직접 춘추관을 찾아 지명 사실을 알렸습니다. 전례를 따른 것이지만 국회의장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한 예우 차원으로 풀이됩니다. 문 대통령이 직접 춘추관 브리핑룸에 선 것은 2017년 취임 직후 이 총리와 임종석 초대 비서실장 인선,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지명, 김동연 경제부총리 및 강경화 외교부장관 인선, 작년 판문점 2차 정상회담 결과 발표에 이어 5번째입니다. 새 총리 지명에 따라 옷을 벗게 될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인 이 총리는 2년 7개월여라는 '최장수 총리'로 기록됩니다.
정 전 의장의 총리 지명은 집권 후반기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공직기강을 다잡아 분위기를 쇄신하고, 국정운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됩니다. 특히 '경제통'으로 정평이 난 정 전 의장을 내각 수장으로 내세우면서 문재인 정부 최대 난제인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울러 국회와 행정부의 협업은 물론 야당과의 협치가 중요한 시점에서 국회의원 6선에 국회의장까지 지낸 정 전 의장이 적임이라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북 진안 출신의 정 전 의장은 전주 신흥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습니다. 정 전 의장은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이기도 합니다. 이후 미국 뉴욕대 행정대학원과 미국 페퍼다인대 대학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전북대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쌍용그룹에 입사해 상무이사까지 지냈고, 참여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내는 등 부처 통솔 및 현장 경험으로 '경제 총리'에 적임이라는 평입니다.
정 전 의장은 15대부터 20대까지 내리 6번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고향을 지역구로 두다 2012년 19대 국회 때부터 '정치 1번지' 종로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에서 김대중 당시 총재 특보를 지냈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의장, 민주당 대표 등 당 최고위직을 잇달아 역임했습니다. 또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운영위원장,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상임위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20대 국회 전반기인 2016∼2018년 국회의장을 지냈습니다.
아울러 2012년 대선 때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뒤 문 대통령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고, 지난 대선 때도 이른바 '정세균계(系)'의 지원사격으로 문 대통령 당선에 일조했습니다. 이런 경력들이 내각을 총지휘하는 총리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특히 입법부 수장을 지냈다는 측면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습니다. 다만 국회 수장을 지낸 인물이 행정부 2인자가 된다는 점이 국회 인준 과정에서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이미 공식 지명전부터 야권을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었습니다. '의전 서열 2위인 국회의장을 지낸 인사가 서열 5위인 국무총리가 되는 게 맞느냐'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의전 서열은 1위인 대통령에 이어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순입니다. 정 전 의장이 총리가 되면 '삼권 분립' 원칙을 깨게 된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이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입법부를 행정부 아래에 두게 되는 듯한 모양새라는 것입니다.
정세균 총리 지명설이 나오자 조경태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은 지난 1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명색이 국회의장을 했던 분이 행정부의 2인자 국무총리 설이 있다"며 "삼권 분립 정신을 무시하는 게 독재가 아니고 뭐냐"고 비판했습니다. 강신업 바른미래당 대변인은 12일 논평을 통해 "국회의 권위와 명예를 실추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강 대변인은 전화 통화에서 "행정부가 입법부를 '졸(卒)'로 보는 것 아니겠냐"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자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그간 많은 의원들이 장관으로 가면서 삼권 분립이 조금씩 무너졌다"며 "국회의장을 지낸 정 의원까지 행정부로 가게 된다면 너무 많이 나간 걸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의전 서열이나 삼권 분립보다 능력을 우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13일 언론 인터뷰에서 "삼권 분립 원칙 등 형식 논리를 말할 것이 아니라 국정을 이끌어갈 능력과 적격 여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정 의원이 능력이 된다면 서열·형식 따지지 말고 임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정 의원이 총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실리적 효과가 크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김진표 의원 못지않은 경제 전문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어 "호남 출신 총리와 영남 출신 대통령이 구도도 잘 맞고 인사청문회 등 국회와 관계에서도 탈이 날 가능성이 작다"고 설명했습니다. '의원들의 장관행'이 이미 관행이 된 만큼 현실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최 교수는 "의원들이 장관으로 가는 건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혼재된 상황"이라며 "사실상 의원들이 장관이 되는 걸 이미 막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 의원만 막는 게 오히려 앞뒤가 안 맞다"고 말했습니다.
의전 서열 역행과 삼권 분립 저해 논란을 일으킨 인사는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선거 당선인 인수위원회는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했습니다. 곧바로 의전 서열 4위가 5위로 가는 게 맞느냐는 논란이 나왔습니다. 행정·입법·사법 3부와 더불어 독립성을 갖는 헌법재판소의 수장을 지낸 인사가 행정부로 가면 사실상 삼권 분립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의원 출신 장관도 꾸준히 논란의 소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최근 집권여당 대표를 지낸 추미애 의원이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것도 의전 서열 역행 논란을 불렀습니다. 여당 대표의 의전 서열은 6위, 법무부 장관은 20위이기 때문입니다. 논란을 막으려면 이참에 '부통령제'나 '의원내각제'로 개헌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국의 경우 선출직 부통령이 상원의장을 겸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제1공화국 시절 부통령이 의회인 참의원의 의장을 겸직하는 제도를 운영했었습니다. 4·19 혁명 뒤 의원내각제로 바뀌면서 부통령제는 없어졌고, 이후 대통령제로 돌아온 뒤에도 부통령제는 부활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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