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 이야기

대하드라마 ‘천추태후’ 채시라 최재성 김석훈, KBS 사극의 흑역사

Chris7 2019. 9. 21. 14:36

‘천추태후’는 2009년 1월 3일 부터 동년 9월 27일까지 방송된 KBS 대하드라마인데, 특이하게도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유일하게 2TV에서 방영되었습니다. 방송사에서 일단은 정통사극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작품부터 KBS 대하드라마는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등을 거치며 암흑기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나마 2014년 ‘정도전’이 KBS 시극의 부흥을 이끌어내지만 이듬해 바로 ‘징비록,’ ‘장영실’ 등을 끝으로 KBS 대하드라마는 잠정 휴식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천추태후는 채시라가 맡았고, 강감찬을 이덕화가 맡은데다가 강조까지도 ‘여명의 눈동자’로 유명한 최재성이 맡는 등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많이 참가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봤을 때 본 드라마에서 배우의 연기력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이 드라마에서 추구한 방향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조영’의 주목할 만한 성공이 있던 후에, KBS 내에서는 '이제 우리도 한 번쯤 트렌디한 작품을 만들어 보자'라는 의견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취지에서 시작된 ‘대왕 세종’의 실패 이후 KBS는 트렌디한 사극보다는 특유의 우직하고 남성적인 선 굵은 사극에 매진하기로 다시 결정한 듯 합니다. 한 마디로 '외도하지 말고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KBS 내부적으로 ‘태조 왕건’의 성공 이후에 고려사를 다룬 사극이 연달아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순차적으로 고려사 소재 사극만 연달아 10년을 방영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것이 ‘제국의 아침’이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였고 시대를 건너뛰어 ‘무인시대’로 선회했다가 이것도 성적이 좀 약하고 사장의 교체로 결국 고려사 사극 계획이 무산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본 드라마의 시대는 ‘태조 왕건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제국의 아침' 다음 시대 이야기로, 광종이 무섭게 혼내고 죽이려 했던 그 어린 아들이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입니다. 즉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의 정신적 후속작으로 시도했던 드라마가 바로 ‘천추태후’인 것인데,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 이 사극은 정통 사극의 역사성을 버리고(역사를 사실 그대로 재연하지도 못했고), 퓨전 사극의 트렌디함을 버린(재미는 너무나도 없는), 두 방식의 문제점을 완전히 접목해낸 훌륭한 흑역사로 남고 말았습니다.


한편, 본 작품은 원래 2008년 10월 초 첫 방영 예정이었으나 KBS가 새 대하드라마의 방송 시기를 새해에 맞춰 연기함에 따라 2009년 1월 초로 첫 방영일이 변경되었으며 시간대도 10시 15분(토요일)/10시 25분(일요일)으로 변경됐는데 주중 이동도 한때 거론되었지만 "(정통사극,대하사극 등은) 호흡이 길어 주중에 편성되기 어렵다"는 법칙 탓에 무산됐다는 후문입니다. 아울러, 당초 80부작으로 기획되었으나 종영 시기가 추석 연휴와 맞물리면서 한 주 앞당겨 막을 내렸습니다.


본 작이 KBS 대하드라마의 흑역사로 남게 된 결정적 요인으론 사서에서 좋은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인물인 주인공 천추태후를 무조건 선한역으로 묘사하는 저질 각본에다 너무나 느린 전개가 시너지를 내어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할 것입니다. 트렌디한 분위기가 주였던 전작 ‘대왕 세종’에 비해 이번에는 정통사극의 틀을 지키되, 외적으로 트렌디한 면을 받아들이려는 시도를 한 것 같아 보이나(가령 황후가 갑옷을 입고 직접 전투에 참전하는 모습이라거나 고려 왕실의 화려함 묘사 등)... 트렌디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40화 정도면 끝나는 이야기를 가지고 무려 78화로 전개했을 정도로 정통사극 특유의 그 느릿느릿한 굉장히 늘어지는 전개방식을 취했다는 점입니다, '여전사'를 연기하기엔 무리가 있는 채시라라는 배우의 한계, 그 외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주인공 편 말고는 죄다 나쁜 놈이라는 구도 등으로 인해 무한히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악의 편 입장에 있던 실존인물들의 대부분이 역사 기록과는 다르게 왜곡되어 있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악역의 대표인 김심언과 최사위 등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기록에선 관리로서 멀쩡히 살다간 인물들이 이상하게도 여기선 악역으로 나옵니다. 극중 악역들이 "역사에 남을 것은 우리이며, 천추태후의 업적은 역사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둥의 대사를 한 것으로 봐서, 그녀를 역사 이면의 숨겨진 영웅으로 만들 셈이었던 것 같은데, 패배자의 부정적인 면이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진 것과, 악당을 영웅으로 포장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대본이 막장인 데는 제작진의 천추태후 감싸기가 극심했기 때문입니다. 목종 시기 사서에 기록된 그녀의 모든 악행은 죄다 김치양 때문인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나마 좀 악의 길(?)로 들어갈 만한 것이, 중반부에 왕 되기 싫다는 아들에게 뺨을 때리는 등으로 강하게 나가고 오라버니 성종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을 넣었는데, 이는 역사상의 실제 사건이랑 전혀 다른 부분입니다. 더군다나 자기 아들이 후계자가 될 확률이 높은데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반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문제 등으로 시청자들에게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 논란을 너무 신경쓴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후에 서서히 캐릭터가 180도 변하더니 천사태후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과 위의 문제점에서 보인 제작진의 천추태후에 대한 옹호적 역사관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대본은 막장의 길로 내달린 것입니다.


또한 고려와의 전쟁 당시의 거란은 성종이 즉위한 이후 '요'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거란'만 국호로 사용하던 시점이었는데, 극중에서는 거란 측 인물들이 대요제국이라는 말을 달고 다닙니다. 민족명보다는 중국식 국호가 더 품위 있어 보인다는 고정관념 때문인데, 정작 당시 거란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요'라는 국호가 유효한 시점에도 '요'보다는 '거란'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극 중 전투장면도 병맛(?)이 철철 넘치는데, 거란 기병대가 곰들을 풀어 고려군을 공격하고, 5m 거리에서 활을 쏴서 적을 날려버리며, 박혀있던 화살을 뽑아 단검마냥 적을 찔러버리는 장면이 1화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게다가 적으로 등장하는 거란족을 거의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오크처럼 분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목종과 유행간의 동성애 장면이 파격적이게도 꽤나 적나라하게 나왔습니다. 직접적으로 키스 장면이 나온 건 아니지만 키스 직전까지 나온다거나 검열삭제를 했다는 장면도 나왔고 같은 침대에서 동침하는 장면 또한 나왔습니다.





여담이지만 투니버스에서 수많은 애니매이션들의 오프닝과 엔딩, 삽입곡들을 개사, 상황에 따라서는 작사, 작곡하며 큰 호응을 얻어냈던 신동식 PD와 이창희 음악감독 콤비가 OST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이창희 자신이 상당수의 OST 작곡가 명단에 올라와있고, 두 사람 모두 참여한 곡이 2곡이나 실려 있는 등 꽤 깊숙하게 관련되어있습니다. 이름만 봤을 땐 대부분 '뭘로 유명하다는 거야?'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신동식 PD는 유명한 질풍가도 작사가입니다. 네이버 인물에는 아예 직업이 피디와 작사가로 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창희 음악감독도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우당탕탕 닥터지’ 주제가를 작사하고 보컬을 맡은 등 많은 애니메이션 주제가들을 담당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추태후’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두 사람은 제대로 재능 낭비한 것입니다.


시청률과 관련해선 아역들이 등장했던 초기엔 23%이라는 상당히 희망적인 수치가 나왔습니다. 새침데기 경종 캐릭터와 초기 정략결혼에도 불구하고 영리하게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듯한 황보수(드라마상 천추태후 본명) 캐릭터는 인기요인이었습니다. 특히 경종역을 맡은 최철호는 초기 짧은 출연에도 불구하고 광기어린 모습과 아들에 대한 부성애 연기에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최철호는 연기생활 내내 굵직한 조연급이었지만 이후 ‘내조의 여왕’과 ‘열혈 장사꾼’ 등 드라마 주연급 배우로 성장합니다(물론 폭행 문제로 한동안 자숙기를 가지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경종이 죽고 천추태후가 성인이 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게 됩니다. 성인이 된 후 이야기 전개부터 질질 늘어지는 바람에 긴장감은 물론이고 모든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시청률이 10%대 초반으로 추락하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시청률이 8.6%까지 떨어졌고 결국 평균 시청률는 15.6%에 그쳤습니다.


오죽하면 사극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차라리 진짜 역사대로 했어야 했다', '현종이 주인공이었으면 재밌었을 텐데', '천추태후를 ‘선덕여왕’의 미실처럼만 만들었어도 재밌었을 것'이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또한 서서히 악역으로 변모되어 간 김치양에게 속고만 사는 모습으로 비춰져 캐릭터가 초반의 영리했던 아역 황보수랑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평들이 많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선덕여왕’ 광풍까지 불어버렸으니 이 바람에 후반의 ‘천추태후’의 시청률은 말 그대로 안습(?)이 되고 맙니다. 그나마 시간대가 달랐던 ‘선덕여왕’과 직접 맞붙지는 않았고, 당시 경쟁작이었던 ‘맨땅에 헤딩’의 시청률이 진짜로 맨땅에 헤딩하는 바람에 이 시기에 방송된 모든 드라마 중에 시청률 꼴찌는 겨우 면했습니다. 2009년 9월 27일,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농사를 짓는 천추태후와 현종, 옆에서 지켜보는 강감찬, 그리고 황주소군 김진(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이 여진족을 이끌게 된다는 내용으로 결말을 지었습니다. 이를 빗대어 ‘시작은 반지의 제왕이요 끝은 전원일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천추태후’와 비견 될 수 있는 막장 사극으로는 MBC의 ‘태왕사신기’가 거론되지만, 그래도 ‘태왕사신기’는 처음부터 퓨전 사극임을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재미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후 소위 정통 사극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드라마들이 ‘천추태후’와 ‘태왕사신기’보다 못한 안드로메다급 고증 오류와 역사 인식 오류에다 막장스러운 전개를 범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젠 퓨전사극에서조차 역사 인식 오류가 나오고 있기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