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는 MBC에서 36부작으로 제작, 1991년 10월 7일부터 1992년 2월 6일까지 방영된 수목 드라마로서 일제시대에서 시작하여 해방 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한국전쟁시기에까지 이르는 시대를 다룬 명품 시대극입니다. 본 작은 격동의 근현대사를 살아가는 주인공 3명의 일대기를 생생한 묘사와 성실한 시대 고증으로 다루었으며, "한국 드라마의 역사는 ‘여명의 눈동자’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스케일이나 연출면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방영 당시 시청률이나 사회에 준 임팩트도 대단했으며, 작품성 면에서도 역대급으로 손꼽히는 드라마입니다.
때문에 이 작품의 리메이크에 대해서도 여러 번 얘기가 나왔지만 오리지널이 워낙 걸작이기도 하고 그만큼의 연출과 연기를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도 힘들다는 게 현재까지의 중론입니다. 그리고 드라마 제작 환경이 그 당시와는 완전히 다르다 보니 돈도 시간도 그 때처럼 쓰기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즉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자사의 전속 배우와 성우, 스텝들을 1년이 넘어 2년이 되는 오랜 기간 동안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이 작품 하나만을 위해서 갈아 넣어가며 거의 대부분을 사전제작 하는 방식의 드라마는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작은 김성종이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10권 완결의 동명의 소설이며, 극작가 송지나가 각색하였습니다. ‘수사반장,’ ‘인간시장’ 등을 연출한 김종학 PD가 스타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게 된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계기로 김종학 사단이라는 용어가 생기는데, 김종학, 송지나 콤비와 함께하는 스텝과 배우들을 뜻하는 말로 그만큼 시청률이나 화제성에서 파워가 강했다는 얘기입니다. 김종학 사단의 바로 다음 작품이 드라마 ‘모래시계’인데, 역시나 송지나 각본에 박상원, 고현정 등이 출연합니다.
본 작에는 몇 회 간격으로 지난 줄거리를 요약한 5분 정도 분량의 오프닝이 있으며, 최종회인 36회는 약 100여분으로 평소보다 특별히 2배 많은 분량으로 방송되었습니다. 사실 ‘여명의 눈동자’는 적어도 세 번 정도는 엎어질 뻔한 기획이었고 1980년대 초에 영화화 계획이 있었으나 역시 백지화되기도 했습니다. 김종학 감독의 본 작도 방송국 윗선에서 여러 번 반려된 기획이었는데 1990년 SBS의 개국에 따른 맞불 전략으로서 MBC가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다고 합니다.
방영 당시 시청률이 50%를 넘어갈 정도에다 화제성 높았던 인기 드라마였지만 믿기지 않게도 명실상부한 ‘콩라인’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같은 시기에 같은 방송사가 방영하던 ‘사랑이 뭐길래’ 때문에... 더군다나 주연 배우들이 지금도 길이 회자되는 엄청난 연기를 했음에도 그 해 MBC 연기대상에서 ‘여명의 눈동자’ 쪽에서 연기 대상이 나오지 않은 것 또한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91년도 연기 대상에서 최재성과 채시라가 각각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박상원이 대상 후보에는 올랐으나 ‘산너머 저쪽’이라는 작품의 김희애가 대상을 받았습니다(요즘 이라면 매우 논란이 될 만한 수상).
극중 박상원이 연기한 장하림은 6.25 당시 경찰의 빨치산 토벌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차일혁은 빨치산 소탕을 담당하는 전투경찰대 제2연대 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조선 공산당 총사령관인 이현상을 사살하고, 칠보발전소를 탈환하는 등의 공훈을 세웠습니다. 특히 빨치산 은신처를 없애기 위한 화엄사 소각 명령에 불복, 사찰의 문짝만 태워 은신처 기능을 없애자는 중재책을 내어놓아 천년 사찰을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후엔 빨치산 토벌 당시 투항을 종용하고 적의 시신도 같이 수습해 주는 등 빨치산에게 온정적인 면이 부각되어 좌익 혐의 조사를 받기도 했고, 공훈에 비해 한직인 지방경찰서장을 전전하였습니다.
박근형이 맡은 친일파 고등계 형사 스즈끼의 모델은 신상묵이라고 합니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까지의 대략적인 행보가 닮았습니다. 한편 노덕술과 더 비슷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친일 경찰에서 해방 이후 반공의 탈을 썼다는 점 때문입니다, 드라마 내에서 테러리스트를 고용하여 암살 등을 시도하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누가 더 나쁜지 비교할 수 없으나 신상묵은 일본 헌병대 출신인데 드라마에서 최두일은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의견 차이는 있으나 인지도 측면만 봐도 노덕술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입니다.
또한 1980년대 외국인 연기자로 국내에서 유명한 데니스 크리스틴이 아얄티 소령으로 나옵니다. 아울러 많은 부분이 배우 본인과 성우에 의한 후시녹음으로 제작된, 아마도 최후의 후시 녹음 드라마일 것입니다. 이는 해외 로케이션과 야외 촬영이 많은 환경 탓이기도 합니다. 당시는 그런 상황에서 동시 녹음을 할 기술과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실내 촬영 등 일부 상황에서는 동시녹음을 했습니다.
캐스팅과 관련해 안명지 역의 고현정은 총 6회 남짓 등장한 조연이었는데, 김종학 PD는 고현정의 가능성에 눈을 떠서 다음 작품인 ‘모래시계’의 주인공을 맡겼다는 후문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최재성도 태수 역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본인이 거절하여 최민수가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때 김미숙이 윤여옥 역으로 물망에 올랐었고 안명지 역은 당초 배종옥이 맡으려고 했으나 본인의 사정으로 하차하였다고 합니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시점에서 되짚어보면 상당히 호화 캐스팅입니다.
음악은 최경식이 맡았는데 메인 테마가 인기를 끌면서 OST 음반이 50만장 넘게 팔렸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영화,드라마의 OST음반이 별도로 발매된 첫 경우로 그 전에 주제가 한곡이 히트하는 경우는 있어도 OST 음반이 따로 발매돼서 몇 십만장씩 팔리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보통 주제가는 노래를 부른 가수의 음반에 나중에 실리곤 했습니다. 하여튼 당시 인기를 모으면서 최경식은 음악 잡지라든지 신문이라던지 여러 곳에서 인터뷰하곤 했는데 방송사 간부들도 그전까지 드라마가 시작하면 보통은 오프닝은 안 보고 다른 곳을 틀곤 했는데 ‘여명의 눈동자’ 이후로 음악을 듣느냐고 오프닝도 보는 경우가 늘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최경식은 김종학의 ‘모래시계’를 비롯하여 ‘걸어서 하늘까지,’ ‘머나먼 쏭바강’같은 많은 드라마 음악을 맡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구로다 가쓰히로라는 일본인은 출판사 고려원에서 1990년대에 낸 책자인 "좋은 일본인, 나쁜 일본인"에서 본 작을 엄청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위안부나 마루타도 그렇고 일본군을 또라이로 그렸다며... 다만 원작에 비하면 드라마에서는 일본군들을 그래도 큰 편견 없는 한 인간으로 그리려고 노력한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그저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후비역 구보다 일등병이라던가, 생체실험 현장을 그리는 임무에 회의를 느껴서 자기 손을 자른 미술병인 오하라라던가, 조선인들 무시하는 모습은 보여도 인간적인 정은 가지고 여옥을 대하는 일본인 위안부 하나코라던가 하는 인물들은 원작에는 없는 인물들입니다. 윤여옥이 일본군들에게 많이 당하기도 하지만, 중국땅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만난 군인들 중에도 여옥이 임신한 걸 알고 자기 먹을 것을 나눠준 소년병이랄지 전투 중에도 여옥을 데리고 다니며 챙겨주는 상등병이랄지 등등 마냥 나쁜 사람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다 대위의 경우는 원작에서는 공명심과 비뚤어진 애국심을 가진 양심 팔아먹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나온다면 드라마에서는 일본인이라던가 사무라이 집안이라던가 하는 것들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면서도 그 때문에 내심 세균전 같은 걸 싫어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남몰래 고뇌하다 자결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구로다 이 사람이 원작 소설을 봤다면 대체 얼마나 발광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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