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 이야기

영화 ‘도라 도라 도라’ 충실한 고증이 빛나는 비운의 전쟁 명작

Chris7 2019. 4. 9. 08:19

영화 ‘도라 도라 도라’는 제2차 세계 대전, 그 중에서도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된 계기인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한 1970년 영화입니다. 제목 "도라 도라 도라"는 공격 성공을 알리는 일본군측 암호입니다. 1970년 당시 제작비로 2500만 달러가 투입된 초대작 전쟁영화로, 미국편 감독과 일본편 감독이 따로 있는데 미국편 감독은 리처드 플라이셔, 일본편은 마스다 토시오, 후카사쿠 킨지. 음악은 제리 골드스미스입니다. 일본편은 본래 그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맡았었으나, 제작사에게 실망한 아키라 감독이 해고당하기 위해 일부러 괴상한 행동들을 계속 해서 결국 교체되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충실한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 그 고증 수준이 영화라기보단 차라리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평이 많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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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도 일본기 미국기를 막론하고 당시 사용된 기종 중 비행 가능한 모든 기체들을 총동원했으며, A6M을 비롯한 일본기들은 레플리카에 가까운 T-6이나 BT-13 연습기의 개조기체이기는 하지만 실제 해당 기종의 생산라인 기술자까지 고용해 가며 거의 실물에 가깝게 개조한 끝에 비행특성마저 실기를 따라갈 정도로 재현하는 등 집요할 정도의 고증이 이뤄졌습니다. 게다가 촬영 당시에는 촬영장을 방문했던 진주만 참전 용사들이 "그 때보다 더 시끄러운 것 같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공을 들인 수작입니다. 비행기 조종사도 곡예비행 전문 비행사를 닥치는 대로 고용해서 일본식 공중전 기술까지 가르친 후 촬영한 덕분에 실제 일본 조종사들이나 하는 수준의 화려한 곡예비행을 펼쳐 보여 어마어마한 박력의 공중전 장면을 재현했습니다. 지상공격 장면도 멋지지만 특히 P-40 워호크와 A6M 제로센의 공중전 장면에 이르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기도 합니다.


미니어처 및 세트 사용 역시 매우 수준급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전함 나가토의 1:1 함 전체 세트와 항공모함 아카기의 비행갑판 세트가 제작되었으며, 미국에서도 영화 종반부의 미군측 주역 중 하나인 네바다급 전함의 풀세트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밖에도 진주만 기습에 참가한 일본 함대 대부분의 미니어처가 제작되었으며, 해상에서의 함재기 발함 후 편대비행 장면 재현에는 미 해군이 당시 보관하고 있던 2차대전형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앵글드 데크 개수가 이뤄지지 않아 옛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CV-16 렉싱턴이 일본 항공모함 아카기 역으로 등장했습니다. 다만 아카기의 함교가 왼쪽에 있는 것은 렉싱턴으로서도 어쩔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촬영해야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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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진행과 인물들의 움직임 또한 역사에 맞춘 흔적이 많이 보입니다. 일본에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연합함대 사령관 취임식을 통해 보여주는 해군과 육군의 해묵은 앙금, 지나친 자신감으로 침략 전쟁을 결의하는 정계와 군부의 수뇌들, 야마모토 제독의 경고에 애매하게 답하는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 작전을 실행할 항공함대 사령관들과 참모들 사이의 반목 등이 그려졌습니다. 미국에서는 해군의 앨빈 크레머 소령과 육군의 루퍼스 브레튼 대령이 협력하여 일본의 공격 개시 날짜를 추리하는 과정, 자신의 판단을 높으신 분들에게 전하려는 브레튼의 고군분투, 해군 작전부장(참모총장) 해럴드 스타크 대장의 결정적인 실수, 함대 사령관 허즈밴드 킴멜 대장과 육군 사령관 월터 쇼트 중장의 판단 착오, 레이더에 포착된 적기를 그냥 넘겨버리는 통신 사관, 뒤늦은 최후통첩에 코델 헐 국무장관이 분노하는 모습 등이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 등장합니다. 현장에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브레튼의 보고를 그냥 흘려버리지 않는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 대장의 면모나, 전쟁 중 화제가 된 윌리엄 홀시 중장의 싸움꾼 기질도 어김없이 묘사되었습니다.


영화의 흥행부분을 살펴보자면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진주만 공습의 과정은 이 영화에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다 묘사되어 있는데 아마 당시 한창 국력이 뻗치며 기세등등하던 시절의 미국인들에게는 자국이 완벽하게 박살나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그 스케일, 그 재현도, 그 공로에 비해 영화 흥행 수익은 미국 내 2954만 8291달러를 거둬서 제작비가 2500만 달러를 들인 것에 비하면 극장 흥행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극장 흥행 성적은 극장과 배급·제작사가 절반씩 나눠 가지기에 5000만 달러는 벌어야지 본전치기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꽤 히트를 치기도 했고(일본이 미 해군기지를 박살내는 영화이기에 당연할지도...) 비디오 대여 같은 2차 시장에서 꽤 수익을 거두긴 했습니다. 그 뒤로 차례차례 더더욱 망한 영화들이 수두룩 나와서 되려 이 영화는 현재 그나마 덜 망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비록 흥행에서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훗날에 와서야 재조명을 받은 비운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 소수의 개인사를 통해 이야기를 끌고 가는 대신 큰 그림을 그리는 데만 철저히 집중하는 이러한 묘사는 전쟁 무기에 대한 치밀한 고증과 더불어 영화의 성격을 확실히 하는 데 기여했으며, 양국 인물들과 각종 병기를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재현해냈으니, 밀리터리 팬들은 누구나 한번쯤 볼 만한 수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로 상영시간은 블루레이에 수록된 일본 개봉판 기준으로도 2시간 28분여로 그리 긴 편은 아니지만 고전 에픽물처럼 전/후반부로 나눠지는 구성 및 전반부의 지루한 전개로 인해 굉장히 길게 느껴진다는 평이 많습니다. 진주만 공습보다도 그 전의 지리한 외교과정 및 전쟁 준비과정이 더 길어 분명 이 편이 리얼리티는 뛰어난 편이지만, 전투신을 기대하고 봤다면 막상 전투신엔 졸고 있기 십상입니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흥행에 실패한 건 땀내나는 아저씨들만 나왔기 때문이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1986년 8월 15일에 MBC에서 광복절 특선영화로 방영한 뒤로 여러 번 재방영되고 있습니다. 다만 자막 번역에 개인적으로 불만인 부분이 한두 군데 있는데, 미 일 양국 장교들의 계급에 관한 것입니다. 미 일 양국의 해군 장교들 계급은 소령/소좌(lieutenant commander)-중령/중좌(commander)-대령/대좌(captain)순인데 이걸 소령은 부사령관 중령은 사령관으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영화가 여러 케이블 채널에서 반복 재방되는데 원본하나의 같은 카피본을 각각의 채널에서 돌리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 작품이 개봉한지 6년 후인 1976년에,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미드웨이 해전을 중심으로 자국을 띄워주고 애절한 연애 드라마도 곁들인 ‘미드웨이’를 이 ‘도라 도라 도라’ 제작비 절반 수준으로 만들어 제작비 4배에 달하는 흥행 수익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미드웨이는 비록 흥행에는 성공하지만 평단의 평가는 좋지 못한데 특히 고증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2001년,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 ‘진주만’ 역시 흥행에는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진주만’은 주인공 캐릭터들의 삼각연애는 물론 일본 해군의 진주만 폭격이후 행해진 미군의 일본 도쿄 공습까지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도라 도라 도라’의 흥행 실패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내용이었던 것에 착안해 비록 전술적으론 별 의미가 없지만 전략적(상징적)의미가 컸던 도쿄공습을 추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