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을 전격 제안하며 국내 정치권이 개헌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몰렸습니다. 과연 실제 개헌이 성사될지 그 가능성이 의문시되곤 있으나 향후 내년 12월의 대선까지 정치권을 중심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것에는 틀림없습니다. 한편 개헌의 핵심사항으로 여겨지는 권력구조 개편과 관련해 새누리당의 주류인 친박계는 이전부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염두에 둔 이원집정부제를 내적으로 거론해 왔습니다. 즉 현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서 이원집정부제로 개헌을 한 후 외치와 국방을 담당하는 대통령엔 반기문 총장, 내치를 담당하는 총리엔 친박계 인물을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선 반 총장 쪽도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시나리오라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밀월관계처럼 보여 왔던 새누리당 주류 친박계와 반기문 사무총창 측 사이에 최근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당초 반 총장을 전면에 내세워 정권 재창출을 기획하고 있던 친박계 쪽에서 반 총장의 중도하차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반 총장 측도 친박계와 손잡을 생각을 않고 거리를 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선실세로 알려진 최순실 씨와 관련된 각종 의혹들이 지속적으로 확산되며 박근혜 대통령의 위상이 추락 일로에 있는 상황이 이런 조짐을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당초 반 총장과 박 대통령 간에는 우호적인 기류가 형성돼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해외 순방 길에 기회가 되면 반 사무총장과 따로 만났고, 반 사무총장 역시 최근 박 대통령의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새마을 사업 보급에 발 벗고 나섰습니다. 지난달 반 총장이 내년 1월 귀국할 것으로 밝힐 때도 친박계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습니다. 당시 정진석 원내대표는 반 총장에게 "10년간 국제 외교무대 수장으로서 분쟁 해결이나 갈등 해결에 경험을 쌓아왔는데, 소중한 경험과 지혜를 미래세대를 위해 써달라"고 말했습니다. 친박계 조원진 최고위원도 "1월에 오신다는 것은 여당으로서는 환영할 일이고, 들어오셔서 국내정치에 대한 부분들도 관심을 가지고 보셨으면 한다"라며 반겼습니다. 친박계 핵심으로 분류되는 홍문종 의원은 '외치 반기문-내치 친박계 총리'를 골자로 한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이랬던 반 총장과 친박계의 '밀월관계'가 요즘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친박계 내에서 반 사무총장에 대한 호감도가 예전만큼 뜨겁지는 않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반 총장 퇴임 후 그를 국가원로로 특별 예우하는 법안을 추진하다 최근 검토하는 것으로 선회한 이종배 의원 측 관계자는 "반 총장의 영입을 염두에 두고 발의하려던 법안이 아니다. 오해의 소지가 커져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한 친박계 의원도 "'반기문 예우법'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강하게 부정한 뒤 "지금으로선 영입 움직임이 없는 상태"라며 내부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반 총장이 야당의 공세로 인해 중도하차하는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내고 있습니다. 이른바 '플랜 B'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만큼 반 총장 우호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방증입니다.
반 총장 측에서도 친박계와 멀리하려는 신호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반 총장이 친박 후보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친박 성향 유권자들도 반 총장의 지지층 외연 확대에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한 여당 관계자는 언론과의 통화에서 "앞으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민 여론이 나아질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최순실 비선실세 의혹'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의혹' 등 측근의 비리의혹 사건이 줄줄이 터져 나오는데도 정권은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어 여론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고 짚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반 총장이 과연 어느 진영을 발판 삼아 승부수를 띄울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반 총장이 내년 초에 일단 대선출마만 선언하고 새누리당 밖에서 두세 달 시간을 끌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됩니다. 이른바 '제3지대론'의 한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에는 반 총장과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의 연대설도 포함돼 있습니다. 새정치를 모토로 내건 안 전 대표와 글로벌 외교에서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는 반 총장간 연대는 파괴력이 적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시나리오가 친박 진영의 고단수 전략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친박계가 경선 없이 반 총장을 꽃마차에 태워준다면 비박계의 강한 반발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우선 반 총장이 외부에서 생환해 돌아오면 친박계 후보와 후보단일화를 꾀할 수 있다는 노림수가 있을 것이란 해석입니다.
한 정치평론가는 언론의 통화에서 "반 총장이 지금 새누리당에 몸을 담아 득볼 게 없다는 판단을 해 전략적으로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면서도 "그러나 이제껏 반 총장이 야권보다는 여권과 교감을 해온 만큼 본선에 간다면 새누리당 후보와 단일화를 이뤄 보수표를 흡수하려는 의도를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1년여 이상 19대 대선 관련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은 줄곧 부동의 1위를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반 총장은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국내에 이렇다 할 정치 세력이 없습니다. 반면 새누리당 내 주류인 친박계는 집권세력임에도 뚜렷한 대권주자 없는 형편입니다. 이런 접에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습니다. 실제로도 양측은 그동안 서로에 대한 높은 호감도를 표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미르·K재단과 비선실세 논란 등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역대 최저를 기록하는 등 여권 내 친박계가 어려움에 처하자 반 총장측이 슬며시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다 친박계에서도 뚜렷한 이유는 감지되지 않지만 반 총장에 대한 이전만큼의 뜨거운 지지세는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양측의 이러한 묘한 기류가 실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고도의 정치 전략에 근거한 의도적 거리 두기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짐작을 해보자면 위에서 언급된 정치 평론가들의 지적처럼 의도가 있는 계산된 거리 두기일 가능성이 높다는게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현실적으로 친박계와 반 총장 양측 모두 서로 다른 대안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잠재적 여권 인사인 반 총장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대권 주자가 없는 새누리당 내 친박계로선 향후 이원집정부제로 개헌을 해서 ‘반기문 대통령-친박계 총리’의 시나리오를 성사시키거나 아니면 현 5년 단임제에서 반 총장을 자당 대선 후보로 밀어 올리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입니다. 반 총장측도 국내에 뚜렷한 정치 세력이 없는 관계로 집권당 내 주류세력인 친박계가 최상의 파트너 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2개월 정도 후면 반기문 총장이 10년간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국내에 귀국하게 됩니다. 반 총장이 여론조사 상 대권주자 지지도 1위이고 보면 그의 귀국으로 국내 정치권은 또 한바탕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한동안 여권으로 갈 것인지 야권으로 갈 것인지 모호한 입장을 보였으나 현재로선 반 총장이 여권에 가담할 것이란게 정치권의 중론입니다. 다만 귀국 후 바로 새누리당에 들어갈 건지 아니면 세간에서 거론하듯 ‘제3지대’에서 일정 시간 머물 것인지는 역시 알 수 없습니다. 19대 대선을 1년여 앞두고 개헌 정국이란 또 하나의 큰 소용돌이에 휩싸인 국내 정치권과 대권 잠룡들의 셈법이 복잡해진 가운데 반기문 총장이 귀국 후 과연 어떤 정치력을 보여줄 것인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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