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 44개를 파일 형태로 사전에 받아보고 수정까지 한 정황을 JTBC가 24일 보도한 이후 다음날인 25일 박 대통령은 "최순실 씨에게 연설문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최 씨가 박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과 발언 자료 등을 사전에 받아봤다는 의혹을 인정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이날 발표한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서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등의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며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과 관련한 그동안의 여러 의혹들을 일부 인정함으로써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습니다.
청와대는 지난 20일 최 씨의 측근이자 박 대통령의 가방 제작자로 알려진 고영태 씨가 “회장(최 씨)이 제일 좋아하는 건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간 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도 21일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연설문 수정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지도 않은 일이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25일 이 같은 문서 유출에 대해 전격 시인하고 대국민 사과까지 하면서 청와대와 최 씨 사이에 문서가 오고가고, 수정된 경로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문 등은 국정 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기밀문서로, 연설 전까지 사전에 받아볼 수 있는 사람은 핵심 참모 몇 명뿐이라는 점에서 이번 문서 유출 파문은 충격적입니다. 최 씨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부터 실제 연설이 이뤄지기까지 뒤에서 이를 수정`보완`조정했다는 것으로, 이는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국정 농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문이나 수석비서관회의·국무회의 발언 등은 각 수석실에서 자료를 올리면 해당 수석비서관 등이 참모회의를 거쳐 연설기록비서관이 초안을 만들고, 이를 대통령이 최종 수정을 거쳐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에서는 최 씨가 대통령을 대신해 최종 수정에 가담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2014년 3월 박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문의 경우 JTBC가 24일 보도한 최 씨 사무실 컴퓨터에서 발견한 연설문 문건에 비춰보면 붉은 글씨 부분이 실제 연설에서 바뀌어 최 씨가 직접 수정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됩니다. 박 대통령의 말을 뒤집어보면 정권 출범 이후에도 최 씨에게서 연설`홍보 조언을 받은 이유가 임기 초반 청와대의 보좌 시스템이 미흡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문점은 박근혜 정부 출범 초 청와대 비서실 시스템이 어땠기에 국정과 관련해서 공적 계선조직인 비서실 라인에서 벗어난 외부의 사인인 최 씨의 조언을 받는 상황까지 초래했느냐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정부 시스템 운용 측면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박근혜정부의 1기 청와대는 인선 작업에서부터 애를 먹으며 취임 초기 잇단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민정비서관, 홍보기획비서관, 법무비서관 등 주요 참모의 내정을 취소했다가 다시 임명하는 등의 잡음을 거쳐 취임 보름 만인 2013년 3월 12일에야 40명의 비서관 인선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표면상 청와대 보좌 시스템이 안정된 시점을 2013년 8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취임 후로 본다면 '김기춘 체제'가 출범한 지 반 년이 넘어서도 최 씨와 연설문 메시지를 상의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의 해명에도 최 씨가 집권 중·후반기에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완전히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최 씨의 '연설문 개입' 파문은 무엇보다도 시스템 정비 미비의 문제도 있지만 박 대통령이 대국민사과 입장 표명에서도 밝혔듯이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사적인 인연의 끈이 공적 영역까지 넘나드는 일탈을 야기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최 씨는 연설문 외에 국무회의와 청와대 비서진 교체 등 민감한 청와대 내부 문서도 발표 전에 받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국 전환용 개헌론을 들고 나와 정치권을 깜짝 놀래킨지 하루 만에 비선실세로 거론되어온 최순실 관련 파문이 대한민국을 또 한 번 뒤흔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랬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저 자신도 심한 자괴감이 들 정도의 참담한 심정으로 어제 하루를 보냈습니다. 평소 개인적으로 현 박근혜 정부를 지지했다거나 우호적 시선을 가졌던건 아니지만 뭔가 크게 배반을 당한 듯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이 정도일 줄이야!’인 것입니다. 도대체 최순실 이란 사람이 무엇이 길래 대한민국의 국정을 이토록 농단한단 말입니까? 드러난 정황으로 판단하건데 최 씨는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입수하고 수정한 것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 정부 고위직 인사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최순실은 최태민 목사의 다섯째 딸입니다. 그리고 최 목사는 과거 박근혜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청와대를 떠나기 전 작고한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드 역할을 하며 인연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문제는 최 목사가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도 부정적 시각의 정보 분석을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박 대통령과 최 씨 모녀와의 인연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의 인연은 특히 박 대통령이 야인 생활을 하던 1980년대 더더욱 공고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박 대통령이 전일 대국민 사과 연설에서도 표현했듯이 ‘과거 어려웠던 시절 도와준 인연’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되돌아보면 과거 정권에서도 예외 없이 정권실세로 분류되던 인물들에 의한 국정 관여와 권력 남용들의 사례가 있어왔습니다. 당시에도 우리 국민들은 여지없이 큰 충격과 자괴감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최순실 사태는 왠지 그 충격의 강도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 어느 정도 짐작은 해왔으나 막상 그 실체를 눈앞에 확인하고 보니 ‘이게 뭔가!’라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비록 과거 정권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어왔으나 그 나쁜 주인공들이 정권 내 실체가 있는 유력 정치인이나 장관급 혹은 청와대 비서진들이었던데 반해 이번 사태의 주인공인 최순실이라는 인물은 공인(公人)과는 반대개념의 말 그대로 사인(私人)이라는 점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굳이 세속의 계급이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것은 아니나 속된말로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 의해 우리 4천5백만 국민들의 정부와 정권이 농락당한 듯한 기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소 표현이 과한 듯 하지만 솔직한 저 개인의 감정입니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하는 자괴감이 도저히 제 마음을 떠나질 않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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