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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잉원 대만총통 당선자, 중화권 최초 여성 지도자

Chris7 2016. 1. 17. 12:45

대만 정치사상 첫 여성 총통이 탄생했습니다. 중화권 여성 지도자는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690~705)이후 사실상 1310년만에 처음입니다. 17일 로이터통신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 등 주요외신에 따르면 차이잉원(59·여) 대만 민진당 주석은 16일 치러진 대만 총통선거에서 승리를 확정 짓고 8년 만의 정권교체에 성공했습니다.

 

 

 

 

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오전 10시50분 현재 전체 1만 5582개소 투표함의 개표를 완료한 결과 차이 후보는 56.1%, 여당인 국민당의 주리룬 후보는 31.0%의 득표율을 각각 기록했습니다. 쑹추위 친민당 후보는 12.8%의 득표율에 그쳤습니다. 총 689만표를 득표한 차이 후보는 주 후보와 308만표 이상의 차이로 압승을 거뒀습니다.

 

 

차이 당선인은 천젠런(64·전 중앙연구원 부원장) 부총통 당선인과 함께 16일 밤 민진당사에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차이 당선인은 "오늘 대만인들은 선거를 통해 역사를 썼고 총통 직선제 이래 세번 째의 정권교체를 이뤘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또 "오늘 선거 결과는 바로 대만 민의가 반영된 것" 이라며 "중화민국이 하나의 민주국가라는 점을, 그리고 2300만 대만 인민이 이를 함께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세계가 주목하는 양안 정책과 관련, '일치성·예측가능성·지속 가능한 양안 관계' 등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하며 5월에 취임하게 되면 현 체제, 양안 간 협상·교류 성과, 민주원칙, 보편적 민의를 양안 관계의 기초로 삼고 당파를 초월한 입장을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차이 후보는 이번 선거 승리로 8년 만의 정권교체를 실현하며 대만 105년 역사상최초의 여성 총통이 되는 영예를 안게 됐습니다. 차이 후보는 마잉주 총통과 인수인계 절차를 거쳐 오는 5월 20일 정식 제14대 총통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총선에서도 민진당은 과반이 넘는 60.1%의 의석을 차지하며 안정적인 정국 운용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대만 소수민족 출신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차이 주석은 대만 국립정치대 법대 교수를 지내다 2000년 천수이볜 정부 시절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장관급)으로 정치권에 들어왔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선거의 여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닙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전쟁터와 같은 선거판에서 숱한 승리를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차이 후보의 ‘선거 여왕’ 전설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민진당은 2008년 3월 치러진 총통 선거에서 셰창팅 후보가 마잉주 국민당 후보에게 대패하며 8년 만에 정권을 상실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민진당 출신인 천수이볜 총통의 부패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민진당은 창당 후 최대 위기를 맞게됩니다.

 

 

차이 내정자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민진당 주석직에 취임했고 이후 3년간 각종 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을 상대로 7차례나 승리를 거뒀습니다. 특히 2014년 11월 말 치러진 역대 최대 규모의 지방선거에서는 국민당을 대파하며 정권탈환을 위한 최대 교두보까지 확보했습니다. 국민당은 전국 22개의 직할시장 및 현·시장 선거에서 15석 확보를 목표로 내세웠으나 6석을 건지는데 그쳤습니다.

 

 

차이잉원이 8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고 대만 역사상 첫 여성 총통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높은 도덕성과 합리성, 온건한 양안(중국과 대만) 정책이 깔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 코넬대학 법학석사,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법학박사 학위를 갖춘 그녀는 대만 국립정치대 등에서 10년간 법학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1994년 리덩후이 전 총통 시절 대중국 정책 자문위원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한 뒤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장관), 입법위원(국회의원), 행정원 부원장(부총리) 등을 역임해 행정 경험도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미혼인 차이 후보는 부패 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정치인으로 통합니다. 무엇보다 그의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정치관은 20∼30대 유권자들과 서민층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를 대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정치인으로 만들어줬습니다.

 

 

2011년 총통 선거 출마 당시 “정부가 존재하는 가치는 소수 사람이 경제 발전의 이익을 누리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번영의 과실을 공동으로 누리도록 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고 “지도자의 가치는 자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데 있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듬해 치러진 대선에서 현 마잉주 총통에게 패해 주석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2014년 5월 93%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선거의 여왕’으로 다시 복귀했습니다.

 

 

대중 정책에서는 천수이볜의 과격한 반중(反中)노선에서 탈피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입니다. “대만과 중국은 ‘조화 속에서 다르고, 조화 속에서 공동 기반을 추구하는’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이 조화는 바로 평화와 발전을 위한 조화”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그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강한경계감을 보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차이는 마 총통과는 국립 대만대학 법률과 선후배이자 정치대학에서 교수 생활도 같이 해 때로 서로 ‘마 교수’ ‘차이 교수’라고 부르는 친근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차이 당선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반부패 척결 추진과 그 용기를 높이 평가하고 시 주석이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푸젠성 성장을 역임한 경력 등에도 주목해온 것으로 알려져 ‘시마회’(시진핑-마잉주 회담)에 이은 또 한번의 양안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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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선거 승리는 소수민족 가정에서 첩의 딸로 태어난 차이 당선인을 중화권 최초의 여성 지도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결과로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차이 당선인의 출생지는 타이베이이지만 그의 혈통은 산악거주 대만 원주민인 파이완족 혈통을 지닌 푸젠성 출신의 객가인 후예로 분류됩니다.

 

 

그의 친가는 이들 부족이 모여 살던 대만 남부 핑둥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버지 차이제성은 2차 대전 직후 자동차 수리업체를 운영하며 돈을 벌어 부동산, 건설, 호텔 사업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인으로 처첩을 5명이나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1명의 형제자매 중 막내딸인 차이 당선인은 첩실이었던 장진펑의 소생입니다.

 

 

한편, 중국은 벌써부터 차이 주석에 대한 견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중국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는 차이 주석에 대한 검색이 차단 됀 상태입니다. 대만 빈과일보는 17일 총통선거 개표가 시작된 직후 웨이보에서 ‘차이잉원’의 이름이 금지 검색어에 포함됐다고 보도했습니다. AFP통신도 웨이보에서 차이잉원 검색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차이 주석의 이름을 웨이보에서 입력하면 ‘관련 법률, 법규, 정책에 따라 차이잉원 검색결과는 보여줄 수 없습니다. 다른 키워드를 입력해 다시 검색을 시도해보세요’라는 글이 뜹니다. 이는 중국 당국이 대만독립 논쟁을 차단하기 위해 검열을 시작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아울러 중국 당국이 대만 차기정부에 대해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며 앞으로 양안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