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의 주인 자리를 두고 4년 만에 재대결하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첫 TV토론에서 맞붙었습니다. 대선(11월 5일)을 4개월여 앞두고 열리는 이번 토론이 현재의 초박빙 판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두 후보는 이날 조지아주 애를랜타의 CNN 스튜디오에서 경제, 낙태, 불법 이민, 외교, 민주주의, 기후변화, 우크라이나·가자 전쟁 등 주제마다 격돌했습니다.
첫 주제는 '경제문제'로, 진행자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 때보다 경제가 나빠졌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라고 물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가 나에게 무엇을 남겨줬는지를 봐야 한다. 우리는 추락하는 경제를 넘겨받았고 (코로나19) 팬데믹을 너무 부실하게 대응해 많은 사람이 죽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우리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경제를 갖고 있었고 그렇게 잘했던 적이 없었다"고 반박하고서 "그는(바이든) 잘하지 못했고 인플레이션이 우리나라를 죽이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정말 우리를 죽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유권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 중 하나인 남부 국경의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안전한 국경을 갖고 있었고 그는 그냥 그대로 뒀어야 했다"며 바이든 대통령이 국경을 개방한 탓에 다른 나라의 범죄자와 정신질환자, 테러리스트가 미국으로 넘어오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남부국경에 사실상 빗장을 건 최근 행정조치를 언급한 뒤 "지금은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40%나 줄었다"면서 "그가 백악관을 떠났을 때보다 더 나아졌다"고 반박했습니다.
러시아가 침략한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는 문제와 관련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우리와 우크라이나 사이에는 바다(대서양)가 있다"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게 아니라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데 더 돈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그는 러시아가 지금까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소유하고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지 않으면 전쟁을 끝내겠다는 러시아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멈추지 않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을 위협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지원이 미국과 세계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두 후보는 여성의 낙태권을 두고도 대립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재선 되면 보수 우위 대법원이 2022년 6월 폐기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복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판결은 낙태를 연방 차원의 헌법 권리로 보호했지만, 대법원의 폐기 결정 이후 여러 주(州)에서 낙태를 금지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낙태는 각 주(州)가 판단해야 할 문제라면서 강간이나 불륜, 임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예외적인 낙태는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대선 결과 승복 여부와 관련,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공정한 선거라면 당연히 승복할 것"이라면서도 "바이든이 끔찍하게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출마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기소도, 어떤 정치적 보복도 없이 다른 장소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해 형사 기소가 자신의 출마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020년 대선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제기한 대선사기 주장에 대해 어떤 법원에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실을 상기시킨 뒤 "당신은 투덜이(whiner)이기 때문에, 당신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지 의문"이라고 공격했습니다.
이번 토론에선 발언 순서가 아닌 후보의 마이크는 꺼두도록 조치해 토론 중 상대방 말 끊기와 상호 비방으로 점철된 4년 전 첫 TV토론에 비해 대체로 차분하게 진행됐지만 감정적인 충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민자들이 뉴욕시 등지의 고급 호텔에서 생활하는 동안 참전용사들이 거리에 나와 있다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참전용사들을 챙기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이 격분하며 "그가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미군 전사자를 '호구'(sucker)와 '패배자'(loser)라고 칭한 것을 언급하고서 "내 아들은 패배자나 호구가 아니었다. 당신이 호구이고, 당신이 패배자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의 장남 보는 이라크에서 복무했으며 뇌암으로 2015년에 사망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최근 '성추문 입막음 돈'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은 것을 물고 늘어지며 "이 무대에 있는 유일한 유죄 평결을 받은 중범죄자"라고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면서 바이든 대통령의 차남 헌터 바이든이 총기 불법 소지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은 것을 지적했습니다.
두 후보는 현재 누구도 뚜렷한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번 토론을 아직 표심을 결정하지 못한 유권자에 확실한 인상을 남길 기회로 여겨 사활을 걸고 준비해왔습니다. 미국 언론도 이번 토론이 올해 선거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 있다고 전망하는 등 이날 토론 성적이 대선 승패를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트럼프는 지난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의 대선 토론 때는 클린턴의 차분한 공격에 논리적인 반박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었습니다. 2020년 대선 때는 바이든과 막말에 가까운 설전(舌戰)을 주고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어조에 여유가 있었고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바이든의 공격에 쉽게 흥분하거나 비웃지도 않았습니다. 평소와 달리 낙태·경제·이민 등의 문제에 대해서 차분한 어조로 자신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CNN은 이날 토론에 앞서 “트럼프의 최측근들은 ‘이전 토론처럼 화를 내거나 막말하는 모습을 보여선 중도층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며 “토론에서 흥분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뉴욕타임스(NYT)도 “이날 토론에서 트럼프는 이번 대선 캠페인의 전반적인 모습과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며 “그는 비교적 절제되고 집중했다. 지난 2020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교훈을 얻는 모습”이라고 평했습니다.
바이든이 “트럼프 때 경제 상황이 더 안좋았다”는 취지로 트럼프를 공격하자 트럼프는 여유 있게 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반면 ‘화가 난’ 쪽은 바이든이었습니다. 그는 트럼프의 발언 중간 중간 트럼프를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노려보거나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고개도 여러 번 가로 지었습니다. 바이든은 말을 수차례 더듬기도 했는데, 이를 들은 트럼프가 “마지막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도 했습니다.
NYT는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의 능력과 나이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속적인 우려에 직면한 채 이날 토론에 임했다”며 “바이든은 시작하자마자 쉰 목소리를 냈다. 그는 목을 비우려는 듯 잠시 기침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고령 이슈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돼는 대목입니다. 이어 “바이든은 또 빠르게 말하면서 자주 말을 더듬어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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