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7주 만에 국가 수장인 총리가 교체됐습니다. 리시 수낵 전 재무장관이 집권 보수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차기 총리에 오르게 됩니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불출마에 이어 지지 의원 숫자가 부족했던 모던트 원내대표도 수낵 후보를 지지하며 불출마해 리시 수낵은 단일후보로 보수당 대표가 됐고 차기 총리에 오르게 됐습니다. 리시 수낵 영국 차기 총리 내정자는 인도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면서도 보수당의 전형적 엘리트 코스를 거쳐온 정치인입니다. 만 42세로, 210년 만에 영국 '최연소 총리'라는 기록과 함께 영국 최초로 '백인이 아닌 소수인종 총리 탄생'이라는 기록도 세우게 됩니다.
수낵 내정자는 인도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지만 보통의 이민 가정에서 자란 경우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인도에서 영국 의대로 진학해 의사가 됐고 이민 1.5세인 어머니는 약사였습니다. 수낵 내정자는 옥스퍼드대, 미국 스탠퍼드대 등 엘리트 코스를 밟은 뒤 금융계로 진출했고, 2015년 하원 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다음 테리사 메이 전 총리 내각을 거쳐 2020년 2월 재무부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파티게이트' 때 재무장관직을 사임하며 존슨 총리와 결별했고, 이후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트러스 총리에 밀렸던 그가 보수당의 새 구원투수로 등판한 겁니다. 지난 대표 경선 때는 트러스 총리가 내세운 감세 정책이 동화 같은 계획이라며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부인은 인도 IT 대기업 창업자의 딸로, 부부의 총자산이 1조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올해 초 부인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구설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수낵 내정자의 가장 큰 성과는 코로나19 대응으로, 영국 경제가 봉쇄로 큰 타격을 입었을 때 유급 휴직 등 적극적 지원 정책을 펼쳐 호평 받았던 점입니다. 수낵 내정자는 지난 7월 "당과 국가에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우리는 전통적으로 보수적 경제 가치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동화가 아니라 정직과 책임을 뜻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지난여름 원내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당원 투표에서 패한 데서 보듯 밑바닥 당심을 얻지 못하는 건 결정적 약점으로 꼽힙니다. 그러나 리즈 트러스 총리가 감세안 파문으로 44일 만에 사임을 발표하고 보수당 내 혼돈 양상 속에서 이번에 총리 자리를 꿰차게 됐습니다. 재무장관 시절 그는 재정건전성을 강조하면서 법인세율 인상과 소득세의 일종인 국민보험 분담금률 인상을 추진했습니다.
영국 총리실은 수낵 내정자가 현지시간 25일 오전 찰스 3세 국왕을 알현하고, 취임 연설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수낵 내정자는 당선 확정 직후 의원들에게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했음이 분명하고, 안정과 통합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수낵 내정자는 트러스 총리와는 정반대로 증세와 긴축으로 고물가부터 잡겠다며 금융시장을 달랬습니다. 두 차례의 총리 낙마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보수당에서 리시 수낵 내정자는 보수당 재건과 경제 위기 극복이라는 숙제를 떠안게 됐습니다.
한편 취임 50일 만에 물러나는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차기 총리 자리를 예약한 리시 수낵 내정자를 축하하며 ‘전폭적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수낵 총리 내정자가 지난 보수당 총재 경선 당시 트러스 총리의 감세안을 ‘꿈 같은 얘기’라고 맹비난했던 점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 드는 대목입니다. 트러스 총리는 24일(현지시간) 보수당 차기 총재 겸 영국 새 총리로 확정된 수낵 내정자를 축하하는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습니다. 존슨 전 총리가 지난 7월 사의를 밝힌 뒤 트러스 총리와 수낵 내정자는 새 총리가 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트러스 총리가 “부유층 등에 대한 세금을 낮춰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공약하자 수낵 내정자는 “동화 같은 경제학”(fairytale economics)이라고 깎아내렸습니다.
의원들 사이에선 수낵 내정자의 인기가 더 좋았으나 평당원 등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투표에서 트러스 총리가 압도적 득표를 올리면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지난 9월6일 당시만 해도 생존해 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알현하는 것으로 총리로서 공식 집무에 돌입했습니다. 이후 여왕이 서거하고 찰스 왕세자가 새 국왕 찰스 3세로 즉위하는 등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영국 국민은 물론 국제사회 시선이 온통 영국 왕실에 쏠리면서 트러스 총리는 취임 초기의 ‘허니문’ 효과를 누릴 기회를 잃었습니다.
여왕의 국장 절차가 마무리된 뒤 핵심 공약이었던 감세정책을 밀어붙인 것이 되레 트러스 총리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고 영국의 국가부도 위기가 가중되는 등 극심한 역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영국의 핵심 우방국인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마저 트러스 총리의 감세정책을 ‘실수’(mistake)로 규정하며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고 비웃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습에 나선 트러스 총리는 감세안 추진의 책임을 물어 재무장관을 경질했으나 이 또한 “총리가 자신의 잘못을 부하에게 떠넘겼다”는 비난만 초래했습니다. 내각의 핵심인 내무장관이 전격 사퇴하는 등 각료들의 이탈 움직임이 가속화하자 트러스 총리는 결국 백기를 들고 지난 20일 사퇴를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일각에선 트러스 총리가 수낵 내정자에게 ‘전폭적 지지’를 약속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란 해석을 내놓고 있기도 합니다. 1975년생으로 아직 47세에 불과한 트러스 총리에게 정계은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도 보수당 의원직을 유지하며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신임 총리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의 전직 총리는 매년 11만5000파운드(약 1억8000만원)의 활동비를 국고에서 지급받는데, 야당을 중심으로 정계 일각에선 “고작 50일 재직한 트러스에게 퇴임 후 활동비를 줘선 안 된다”는 목소리까지 터져나오는 실정입니다. 트러스 총리에게 수낵 내정자의 ‘보호’와 ‘배려’가 절실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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