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 이야기

이미연의 드라마 ‘거상 김만덕’ 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여성 CEO

Chris7 2016. 2. 16. 08:30

조선 최초의 여성 CEO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조선시대에 이미 실천했던 제주 거상 김만덕을 소재로 드라마 ‘거상 김만덕’이 지난 2010년 KBS에서 방영되었습니다. 드라마 '거상 김만덕'은 영화 ‘좋아해줘’로 오랜만에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이미연이 주인공 김만덕역을 열연했으며 그 외에 한재석, 박솔미 그리고 고두심 등이 주연급으로 출연했었습니다. 30부작으로 방송되었으며, 촬영은 김만덕의 주 무대였던 제주도에서 이뤄졌습니다.


특히 ‘거상 김만덕’은 드라마의 히로인 이미연이 2007년 SBS 드라마 ‘사랑에 미치다’ 이후 약 3년만의 드라마 출연이라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고생 신분으로 1987년 미스 롯데 1위로 선정되며 연예계에 데뷔한 이미연은 KBS1 청소년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서 가난한 간호사 역으로 출연 당시 드라마에서 아직 주인공들 중 비중이 적은 조연격이었던 최수종 (의대생이며 부잣집 아들역) 과 주연이었던 손창민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역으로 출연하였는데, 당시 아직까지 조연에 불과했던 신인급 최수종과 '여고생'에 불과했던 이미연 모두 크게 주목받았으며, 분량이 늘면서 둘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특히 이미연은 당시 '청순 가련'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때의 인기로 가나초콜릿 CF 및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에 출연하였으며 하이틴 스타로서 첫 번 째 전성기를 가집니다.


이미연은 이후 1995년 배우 김승우와 결혼하였으나 5년 뒤 이혼하였고 이때 영화 ‘물고기 자리’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명성황후 (2001)를 맡으면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후에도 출연한 영화 ‘흑수선,’ ‘인디안 썸머,’ ‘중독’에 출연하여 충무로 여배우 입지를 다집니다. 그러나 2000년 중반 이후부터 꾸준한 작품 활동은 못 하고 있던차, 영화 ‘좋아해줘’에 이어 드라마 ‘거상 김만덕’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된 것입니





드라마의 모델인 김만덕은 영정조시대 인물로 조선시대 기녀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탁월한 상술을 발휘하여 많은 돈을 모은 뒤, 흉년으로 인해 전 도민이 아사직전에 있던 제주도에서 부의 사회 환원을 직접 실천했던 여성입니다. 당시 그의 행적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에까지 등장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만덕(1739∼1812)은 조선의 전무후무한 CEO이자 자수성가 여성상인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전 재산을 기부한 '제주 의녀'로 이름을 남깁니다. 김만덕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 혼자의 몸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이를 흉년에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내놓았으며, 공적을 인정받아 대궐에 초대되어 임금을 알현하고 사대부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파격적인 행보였지요.






만덕은 1739년 제주에서 아버지 김응열, 어머니 고씨의 2남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11살 무렵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가 사망하자, 친척들은 일을 할 수 있는 오빠들만 거둬들였고, 홀로 버려진 만덕은 인근에 사는 기녀의 도움으로 기방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기녀의 수양딸이 되었기에 자연히 기적에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총명함과 미모를 갖춘 관기로 이름을 날렸지만, 만덕은 기방의 삶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고 관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그녀를 딱하게 여긴 제주목사가 기적에서 이름을 삭제해주기에 이릅니다.


어린 시절은 고생스러웠지만, 남자에게 기대어 살기보다 스스로 돈을 벌어 자립하는 보람을 알게 했다는 점에서 만덕에게는 오히려 고마운 시간이었을 겁니다. 23세에 양인의 신분을 되찾은 만덕은 모은 돈을 털어 제주 건입포 일대에 객주를 차리게 됩니다. 당시 객주는 여관이자 식당이면서 육지의 생필품과 제주의 특산물을 거래하는 중개상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총기 있고 계산이 빠른 그녀는 점차 늘어나는 무역 거래를 선점하기로 결심하고 육지의 쌀과 소금을 독점적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만덕의 객주집은 금세 제주 최대의 무역거래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남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의류와 장신구, 화장품 거래-제주의 양반댁 부인들에게 공급하기 위한-와 같은 틈새시장을 뚫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물가 변동의 흐름을 파악하고 적절한 시기에 물건을 사고팔아 엄청난 차액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처럼 과감하고 적극적인 경영법으로 기녀출신 독신여성인 만덕은 제주에서 자수성가한 갑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된 것은 1795년. 1792년 이래 제주에는 흉년과 태풍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려야 했습니다.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제주목사인 심낙수는 조정에 구휼미 2만석을 요청했으나, 제주로 오던 5천 섬의 구휼미를 실은 배들이 그만 침몰하고 맙니다. 아사하는 빈민들의 모습을 본 만덕은 1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오게 했습니다. 들여온 양곡의 10분의 1은 친척과 그동안 은혜를 입은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 450석은 모두 관에 보내어 구휼미로 쓰게 했답니다. 제주민들은 '기부천사' 만덕을 칭송했고, 제주목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그녀의 행적을 알렸습니다. 보고를 받고 감동한 정조는 친히 "무엇이건 소원을 들어주라"고 하명했습니다.


나랏님으로부터 '백지수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만덕. 그러나 그녀가 제시한 소원은 대단히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첫째,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고 싶다. 둘째, 절경이라는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 일만이천봉을 구경하고 싶다." 당시 제주에는 법으로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남자는 허가증이 있어야 섬을 떠날 수 있었고, 제주의 여성들은 평생 바다를 건너 육지에 오를 수 없었으며 육지 사람과의 혼인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평민 여성이 입궐해 왕을 알현하는 것 역시 당시로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덕은 이 관습의 굴레들을 벗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득의 '발칙(?)한 소원'을 전해들은 정조는 그녀의 희망을 이뤄주기로 합니다. 만덕에게 내의원 의녀반수(醫女班首,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였다 함)의 벼슬을 내려 궐에 들어오게 했고, 만덕은 정조와 중전, 세자빈을 알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1796년(정조 20년) 가을, 만덕의 나이 57세였습니다. 이후 만덕은 1797년 늦은 봄에 금강산을 구경하고 제주도로 돌아갔으며, 1812년 사망했습니다.






몇 년 전, 오만원권 지폐 도안에 들어갈 여성인물 후보 중 한 명으로 김만덕이 언급되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2007년에 신사임당으로 결정이 되긴 했지만, 현대에 맞는 여성상을 기린다는 의미에서는 김만덕이 훨씬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나라며 아쉬워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합니다.


변방이었던 제주의 인물이라는 점, 태생이 평민이고 기생 출신이었다는 것 때문에 김만덕은 그 상징성에 비해 너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위인으로 남은 듯합니다. 앞으로 그녀의 시대를 앞서간 능력이 현대의 여성 CEO들이나 커리어 우먼들에게 귀감이 될 기회가 늘어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