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상영작 빅3중 하나인 ‘대호’가 16일 개봉하였습니다. 100년 전 사라졌던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가 박훈정 감독의 영화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 것입니다. 다수의 설화를 통해 친숙하게 접해왔던 호랑이는 오랜 시간 우리 민족의 신령스러운 존재이자 민간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에 의해 지난 1921년 경주에서 포획된 기록을 마지막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모티프를 얻어 탄생한 영화가 바로 '대호'인 셈입니다. 스크린을 통해 묵직한 드라마, 울림 있는 메시지와 함께 탄생한 영화가 진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영화 '대호'는 욕망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1925년, 더 이상 총을 들지 않으려는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 분)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천만덕은 젊은 시절 조선 최고의 명포수로 이름을 떨쳤지만 오래 전 사냥에서 손을 떼고 아들 석(성유빈 분)과 함께 지리산 산막에서 약초를 캐며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딱 먹고 살 만큼만 잡고 그 이상의 살생은 자제하는, 조선 사냥꾼들의 룰을 지키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대호'의 가장 큰 미덕은 천만덕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해지는, 사라지고 단절된 우리 민족의 가치관의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리산의 대호를 잡아달라는 일본의 끈질긴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고 제 소신을 지키며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한 인간의 드라마가 진한 감동을 자아냅니다. 이후 그려지는 천만덕의 부성애와 비극이 더욱 강렬한 드라마로 다가오는 이유도 이전의 감동에서 비롯된 유대 관계가 깊기 때문입니다. 아픈 역사의 기억 위에 조형된 천만덕은 최민식의 묵직한 연기로 구현되며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대호'의 드라마는 천만덕과 갈등 관계를 형성하는 아들 석의 이야기로 클라이맥스로 치닫습니다. 영화에는 조선 포수대 리더 구경(정만식 분), 일본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 분), 일본군 장교 류(정석원 분) 등 다양한 갈등 관계를 유착시켰지만 극 초반부터 각 인물간의 서사를 치밀하게 쌓아가는 데 치중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갈등은 점점 고조될 뿐 갈등이 터지고 봉합되는, 기존의 전형적인 기승전결로 귀결되는 명확한 구성법과는 사뭇 다르지만 관객들의 호기심을 추진해가는 긴장감을 놓지 않았습니다.
갈등 관계를 통해 드라마틱한 안타고니스트를 조형하고 단순한 항일영화로 귀결시키지 않은 점이 이 영화의 특별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전설적인 조선 호랑이의 왕 대호를 정복하려는 마에조노는 자연보다 우위에 서려 하는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을 그리는 것으로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들의 욕망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귀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사유하게 만드는 힘을 갖습니다. 적극적으로 관객을 영화에 개입시키지 않지만 프레임 밖에서 성찰을 유도한 연출 덕입니다.
'대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관전 포인트는 단연 CG로 구현된 대호입니다. 영화 속 대호는 모션 액터를 거쳐 전체 몸길이 3m80, 무게 400kg의 CG로 탄생했습니다. 다소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감상에 크게 방해가 되진 않아 보입니다.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시속 80km로 질주하는 대호의 모습은 조선 마지막 호랑이의 위용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촬영 당시 대호의 형상만을 가늠하고 연기를 펼쳤다는 배우들의 열연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호와 배우들의 호흡에 있어서 어긋나는 듯 보이는 지점이 없을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다소 허무맹랑한 몇몇 장면들과 최민식의 살짝 살찐 모습 등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값진 감동 요소와 메시지가 이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눈발 날리는 광활하고 위대한 자연의 모습이 담긴 장면들도 놓치지 말아야 할 명장면들입니다. 그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면서도 그 순리를 거스르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박훈정 감독이 '대호'라는 거대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를 통해 유의미한 상징체계를 시도하고 자신의 예술성을 발휘, 민족의 정서를 전달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박훈정 감독은 지난 8일 가진 언론시사회에서 “사라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냥하며 살았던 사냥꾼들과, 그때까지 지켜왔던 우리 민족의 가치관 등이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단절되고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 메가폰을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포수에게 총은 사냥을 하는 도구입니다. 말하자면 포수 천만덕에게 총은 생존이고 살아가는 이유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린 포수 천만덕은 총을 들지 않고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더라도 자연속에 묻혀 순리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이입니다.
암울했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 또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그 무엇들. 대호와 천만덕이 영화 속에서 겹쳐지며 전하는 울림은 비단 과거에 그치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총을 들고 무엇을 지키고 싶다는 것' 결코 녹록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포수의 총'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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